온전한 해방
나는 김영하 작가를 잘 모른다.
주로 고전을 읽었고 현대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글은 어쩐지 구미가 당기지 않아 자의로 읽은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한때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문학계에서 꽤 유명한 인사구나 했을 뿐 별다른 관심을 둔 적도 없다. 「여행의 이유」가 베스트셀러 칸을 장식했을 때도 서가에서 책을 꺼내 몇 페이지 넘기다가 지리한 이야기겠거니 하며 그 자리에 돌려놓았다.
하지만 학교 서고에서 마주한 작품의 제목은 이목을 끌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파격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늘 아름다운 것, 바른 것, 밝은 것을 따르고 취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게 사회적 계약으로 인해 발현된 당위성이라고 생각할 새도 없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왔다. 이런 옳은 삶을 추구해온 나에 대한 염증과 지루한 일상이 주는 무력감으로 심연 속으로 빠져들던 내게 이 책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과연 동아줄이 되어줄까, 발목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될까. 뭐가 됐든 설레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1990년대 무렵 ‘나’는 고객의 의뢰를 실행하는 일은 하는 누군가다.
실행이란 의뢰인이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는 악마, 저승사자 혹은 호스피스와 같다. 의뢰인이 될만한 사람을 찾아내어 죽음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게끔 속살거린다. 그렇게 설득된 의뢰인에게 죽음으로의 가이드를 제공하고 그 끝을 함께 해주는 것. 그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그는 일을 하고 나면 으레 여행을 떠난다.
낯선 곳에서 고객을 떠올리고 곱씹어주는 것, 그것까지가 그의 일이다. 그의 일상과 의뢰인을 떠올리며 쓴 소설이 묘하게 어우러져 전개된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유디트와 미미다. 두 여인은 어딘가 닮아 있으며 판이하게 다르다. 유디트는 말뚝에 매인 나귀처럼 불우한 환경에 매여있으나 정신은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다. 그 간극에서 나오는 행동은 괴랄하기까지 하다. 만나던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그 형의 집 거실에서 관계를 가지거나 다음날 그 형과 추파춥스를 다 먹기 전에 끝나버린 지리한 관계를 가진 것. 생일날 형을 불러내어 고향을 향해 가다가 문득 혼자 떠나버린 것. 유디트의 정서는 이해되지 않으나 현실이나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생각은 이해가 되었다. 어딘가 중간에서 멈추고 갇혀버린 느낌이 아니었을까. 미미는 충분히 자유로웠다. 인정받는 예술가로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하며 내면을 발산하였으나 정작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과거 국어선생과 저지른 불륜 때문은 아닐 거다. 다만 틀을 깨고 싶어 했고 어딘가 풀려버린 자신을 마주하는 하는 게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다. 유일한 공통점은 두 사람은 ‘산다는 행위’가 지루했고 끈이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풀려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가스가 가득 찬 집과 핏빛 욕조로 이끌었고 그들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래서 C, 유디트가 만났던 택시기사 K의 형의 이목을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딘가 텅 비어 있었고 그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두 여인이었다. 떠나버린 두 여인을 대신하여 미미를 비디오 속에 가두었고 끊임없이 그 프레임 속을 탐닉한다. 그건 그만의 종결이었다. 동생 K 역시 람보르기니를 꿈꾸지만 현실은 스텔라TX 택시에 올라타 총알처럼 운전할 뿐이다. 평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던 그는 유디트가 떠난 자리를 속도로 채우다가 결국 브레이크 대신 액셀레이터를 선택하며 기약 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쓴 그는 변하지 않는 조화처럼 단조로운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며 머지않아 자신도 선택을 할 것임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요즘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간만에 속도를 내어 읽었다.
두 시간이 채 안되어 다 읽었다. 성인 ADHD를 의심하게 했던 그 느낌, 대뇌피질에 막이 쳐진 느낌도 없었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속독했더니 상쾌한 기분이다. 어쩌면 몰입이 된 것이 아닐까. 일상적이지도 않고 밝지도 않아서, 그렇다고 음습하지도 않아 좋았다. 복잡한 감정과 정서가 담담하게 쓰여 있어 좋았다. 담백했다. 소설 특유의 작위적인 문어체도 거의 거슬리지 않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내 삶은 내 맘대로 결정한 권리가 있다. 그 끝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든 내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든 뭐든 말이다. 하나의 삶을 강요하지 않는 모습에 대리 만족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혹은 삶은 장밋빛이 아니라 몹시도 단조롭고 지리멸렬할 수 있다는 것에 크게 공감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오늘의 나는 이 작품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그림, 음악을 적절히 섞어놓은 것도 좋았다. 온전하게 글을 담아보려 작품도 찾아보았다. 이 또한 전혀 방해가 안되었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절대 죽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발목을 붙잡던 것의 소멸, 이 모든 것의 종결이 주는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고 단순한 대리만족일 수 있다. 하지만 각 인물들이 보여준 마지막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오늘의 나에게는 어떤 말들보다도 위로가 되었다. 그냥 그대로도 괜찮다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뿐 아닐 거라고,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베르테르와 같이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고 인생 노잼 시기가 왔다면, 와중에 조금 우울하다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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