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짜게 식어서
간만에 무슨 책을 읽을까 서가를 보다가 기욤 뮈소의 책을 잔뜩 골라왔다.
유발 하라리, 알랭 드 보통, 기욤 뮈소, 파울로 코엘료, 오쿠다 히데오, 무라카미 하루키, 도스토옙스키, 요나스 요나슨, 헤르만 헤세, 박완서. 이제는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려 기억도 나지 않는 내가 좋아한 작가와 작품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이름들이다. 누구나 알만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고 내게 영향을 줬던 작품의 저자들이어서 오래 독서를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 둘 떠올랐다. 그중 기욤 뮈소의 책을 고른 건 추억 때문이다. 단어만으로도 찌르르한 첫사랑의 추억.
이르지 않은 나이에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했고 그에게서 처음 선물 받은 책이 바로 <구해줘>였다. 그날의 우리를 돌아보면 아무런 계획 없이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고 손을 잡고 이리저리 구경을 다니던 참이었다. 야구를 정말 좋아했던 그와 그의 속도에 맞추어 야구를 더 좋아하게 된 나는 각자 응원하는 팀의 피규어를 발견하고는 어린아이처럼 달떴다. 언제나처럼 우리 팀이 좋네, 너네 팀은 별로네 티격태격하며 그렇게 서점 쪽으로 향했다. 서점 특유의 책 냄새와 사각사각 책 넘기는 소리에 이내 입을 다물고 둘러보던 참이었다.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뜨였고 선물해달라고 장난으로 툭 던진 말에 그는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가서 무언가를 끄적이고는 내 품에 <구해줘>를 안겨주었다. 몇 번인가 <살려줘>라고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하루 만에 나는 그 책을 읽었고 눈물을 꽤나 쏟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절절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책 표지처럼 발간 낙엽이 지는 그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우린 헤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그토록 애틋하던 사랑이 끝나는 것도, 우리가 남이 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꽤 오랜 시간 나는 힘들었다. 이후 후회할 것 같다며 연락한 그에게 야멸치게 어른답게 굴라고 쏘아붙이고는 며칠 밤을 울기만 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저 나를 참 많이 사랑해준 사람, 그리고 내가 가장 편했고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인 <구해줘>는 빛은 바랬을지언정 포근하고 행복했던 추억을 간직한 채 내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다.
그래서 기욤 뮈소는 내게 사랑이자 따듯함이다.
이와는 달리 마지막 이별은 마치 예정되어 있던 일을 한 것처럼 당연하고 담담했다. 내게 수많은 망설임과 고민만을 안겨줬던 만남, 끝내 생채기로 남을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묻어두었던 모든 힘듦이 너무나 무거워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그런 너와 나의 만남. 가끔 내가 달랐더라면 우린 달랐을까 생각해보아도 답이 똑같이 나오는 그런 만남이었다. 우리의 온도는 참 차가웠다.
문득 따듯함이 그리워졌던 걸까. 망설임 없이 기욤 뮈소의 책들을 꺼내 들었다.
오로르와의 짧은 계절이 끝난 후 톰 보이드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이자 에이전트 밀로가 파산을 고백하며 연작의 마지막 권을 집필하도록 톰을 일으켜 세우고 톰은 끝없는 좌절만을 느낀다. 그러다 책 속에서 주인공인 빌리 도넬리가 현실로 뚝 떨어져 버렸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여러 사건을 거친 후 톰, 밀로, 그리고 이들의 생명과 같은 친구 캐롤은 모두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들은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을 오가며 빌리를 살려내어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 속에서 네 사람 간 감정이 싹트고 꽁꽁 숨겨졌던 비밀이 드러났다. 천신만고 끝에 빌리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톰 보이드는 사랑하기 시작한 여자를 보낸 대신 예전의 명성과 부를 되찾게 되었다. 이후 에피소드는 반전 포인트이기도 하고 내게도 클리쉐(cliche) 같은 느낌이라 자세히 기술하지는 않겠다.
톰에게 사랑은 전부였다.
오로르에게는 자신이 전부였다.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던 여신 오로르가 떠나자 그는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오로르는 좋은 집안에서 미모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자신에게 결핍된 모든 걸 가진 태양과 같은 존재였고 그의 뮤즈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가진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사랑 앞에 도망치는 한낱 연약한 사람일 뿐이었다. 나도 크게 공감하는 그녀의 심리. 친구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내겐 너무 어렵다. 자존심도, 내 생활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와 유사한 감정이 느껴지면 나는 도망친다. 사랑에 있어서는 겁이 많고 이기적인 사람이라 나를 오롯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그 즉시 뒷걸음질 친다. 아마 발현 기제는 달라도 오로르도 이런 감정이지 않았을까.
이런 오로르에게 그의 사랑은 너무 크고 빨라 톰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던 이카루스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추락한 이후에는 톰에 대하여 크게 공감했다. 나도 무언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혹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 닥치면 폭식이라는 자기 파괴적 행위를 한다. 톰의 경우에는 약을 먹고 죽은 듯이 무기력해지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 기복이 큰 편이어서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는 무서울 정도로 침체되었다. 최근 2년은 정말 최악이었고 내 인생에 대해 크게 상심했다. 어떤 계기는 있었을진대 사람이 그렇게도 스스로를 놓을 수 있구나 했다. 그래서 톰이 진심으로 이해되었다. 내 경우 지금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가면서 기복의 폭이 현격이 줄어들긴 했으나 요 며칠 슬럼프 비슷한 것이 올 조짐이 보여 매몰되지 않으려 용을 쓰고 있다. 무조건 외면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등을 통해 생각을 풀어내어 슬기롭게 수용해보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다. 그러나 톰은 글 쓰는 것이 업인지라 글로도 풀어내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서야 이를 해소했다.
이렇게 많은 생각과 깊은 공감에도 불구하고 감동은 없었다. ‘드디어 완독 했다!’는 덤덤함과 성취감. 이전처럼 무언가 울컥하며 올라오지는 않았다.
기욤 뮈소 특유의 따듯함과 세심함은 그대로였고 반전도 그럴듯했다. ‘에이, 설마.’하다가 따악하고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도 꽤 있다. 빌리와 톰이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피워낸 절절한 일상을 보낼 때는 함께 애달팠고 다시 만난 그들이 풍기는 설렘과 기쁨 앞에서는 축복하는 마음과 부러움, 질투가 뒤섞여 심란한 마음이었다. 캐롤이 그간 품고 있었던 무거운 비밀을 밀로에게 털어놨을 때는 내 마음이 쿵 하고 무너지는 기분이었고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허울만 좋은 오로르의 사랑은 마치 내 것과 같아 씁쓸했다.
그렇지만 내게 크게 울림을 주는 부분은 없었다. 그냥 잘 적힌 소설을 읽었고 어떻게 하면 이렇게 짜임새 있게 두꺼운 책을 써낸 걸까 궁금했다. 아울러 나는 언제쯤 이렇게 유려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내가 소설을 쓸 수는 있을까 하는 류의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 사랑이 끝난 후여서 그런 건지
이전의 따듯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가슴이 아닌 머리로 내 사랑과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오늘부터는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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