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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15. 2021

프롤로그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이야기


왜 회계사가 주인공인 영화나 드라마는 없을까?


회사를 다니며 늘 그런 생각을 했다. 회계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왜 드라마 속 주인공은 항상 의사나 변호사, 검사, 혹은 경찰이어야만 할까? <하얀 거탑>이나 <라이브> 같이 회계사의 삶을 주제로 한 멋진 드라마는 왜 나올 수 없을까.


야근 후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머릿속으로 시놉시스를 구상하곤 했다. 간지가 철철 넘치는 멋진 여자 회계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다소 황당하지만 그 상상 자체가 재밌었다.


회계사는 대중과 거리가 먼 직업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심지어 부모님과 남편조차도 회계사가 정확히 뭘 하는 직업인지 잘 알지 못한다. 회계사 수험생들이 모인 카페에선 한 때 이런 우스갯소리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설날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를 한다고 하면, '그래, 요새 부동산이 대세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 공인회계사라는 직업이 낯설어 공인중개사와 헷갈려들 하신다는 웃픈 이야기다.


나 역시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때, 그리고 회계사가 되고 난 후에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다. 회계사가 단순히 '돈이나 세는' 직업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고, 회계사라는 직업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회계사'라고 하면 두꺼운 안경을 쓰고 한 손에는 계산기를 든, 어딘가 꽉 막히고, 어딘가 찌질한 이미지가 떠오른다고도 했다.


그래, 회계사는 범죄자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고, 법정에서 싸우거나,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직업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들을 한다. 변호사나 의사처럼 대중에 친숙하진 않지만, 회계사의 삶도 정말 엄청나게 다이내믹하다. 배움과 성장의 기회도 정말 많은 직업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꼭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늘 쓰고 싶었다. 회계사를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연봉이나 입사정보 같은 재미없는 것들 말고, 회계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 내가 한번 써보고 싶었다.



2011년 12월 입사, 그리고 2017년 11월 퇴사.


아무것도 몰랐던 스물셋의 싱그러웠던 겨울부터, 스물아홉의 끝자락에 서기까지, 나는 회계법인에서 회계사로 살았다. 잦은 야근과 출장, 상사와의 갈등, 갑질 하는 클라이언트, 원치 않는 성희롱, 회사 내의 많은 압박. 겨우 이십 대 중반이었던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 참 많았다. 철이 없는 데다 타고난 관종이었던 난 보수적인 그곳에서 늘 눈에 띄었고, 종종 미움을 받거나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를 너무도 사랑했다. 치열하게 공부해 회계사가 되었고, 운이 좋아 회사에서 나름 인정 받았다. 휴가가 넉넉한 법인 환경 덕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전문직이라는 타이틀 덕에 수많은 소개팅을 했고, 최고의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나의 명함은 어디에서나 자랑거리였고, 그곳에서의 삶 덕분에 내 20대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누구보다 열심히 나의 직업을, 그리고 회사 사랑했었기에 그냥 묻어두기엔 아까운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회계법인에서 일할 땐 늘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없었고, 퇴사 후엔 내가 과연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심이 됐다. 고작 회계법인에 6년 다녀놓고 회계사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좀 부끄럽기도 하고, 동기들이 내 글을 본다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but, 누가 비웃건 말건 알게 뭐야? 회계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쓸 수 없지만, 내가 주인공인 에세이는 마음껏 쓸 수 있는 거니까.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지역에 30년 살았던 사람보다 고작 3개월 여행한 방랑자가 더 멋진 여행기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몇 개월을 여행하고도 멋진 여행기를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나는 6년이나 그곳을 '여행'했잖아.


그렇게 나는 퇴사한 지 무려 4년 만에 그토록 쓰고 싶었던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뒤늦게나마 과거에 남겨뒀던 조각들을 모으고, 머릿속을 헤집어 행복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조금은 빛바랜 추억들이겠지만, 여전히 내게 생생한 이야기들을 쓰고 싶다.


결국 내가 쓰게 될 이야기는 '회계사의 삶'을 가장한, 찬란했던 나의 20대에 대한 기록이자 내가 이 직업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장황한 이유들의 나열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집에 몇 장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내 마지막 명함


마지막 퇴근길에 찍었던 회사 간판




P.S. 드라마나 영화 속 회계사

1) 입사 2년차 쯤이었나, 부모님이 보시는 일일드라마(제목은 기억 안 남) 속 여주인공이 회계사로 나온 적이 있다. 꽤 똑똑한 여자 주인공 설정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극 초반에 죽음을 맞이해버림...


2) 2019년에 방영된 <태양의 계절>이라는 일일드라마 남자 주인공(오창석)이 회계사로 설정되었다. 인물 소개에 따르면 '고아 출신 회계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인생 역전하여 한국판 워렌 버핏에 도전하는 슈퍼리치'라고 되어 있음. 하지만 일일드라마라 막장 요소가 많을 것 같아서 손이 안감.


3) 가끔 할리우드 영화에도 회계사들이 등장하긴 하는데, 보통 찌질이로 나오거나 금고 열다가 총 맞고 죽어 버리곤 하더라. 그나마 <어카운턴트>라는 영화에 회계사가 조금 멋지게 나온다. 천재 회계사가 주인공인데, 사실 회계사라서 멋있다기보다 총 엄청 잘 쏘고 싸움 엄청 잘하는 천재라서....  


4)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방영 예정작 중 <트레이서>라는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임시완)이 회계사로 나온다네? <어카운턴트>에서도 그렇고 <트레이서>도 그렇고, 둘 다 대기업 뒷돈 관리해주는 역할로 나옴... 회계사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닌데ㅠ_ㅠ 흑


5) 부부의세계에 주연급 조연인 손제혁(김영민 분)이 회계사로 나왔다고 친구가 제보를 해줬다. 돈 잘 버는 개인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바람둥이로 나온다고... 그래도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에 회계사가 나왔다니 넘 반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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