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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15. 2021

합격의 순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참으로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참으로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날

합격자 명단을 띄워놓고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의 수험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의 합격 축하 전화였다. 이윽고 나보다도 먼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해 준 친구들의 카톡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 석자를 꾹꾹 눌러 쳐보았다.


결괏값은 2개. 1차 합격자 명단에 올랐던 나의 동명이인도 나란히 나와 함께 합격을 한 모양이다. 1차 합격자 명단에서 동명이인을 발견하자마자 둘 중 한 명만 합격한다면 떨어진 나머지 한 명얼마나 서운할지, 그게 내가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오해의 축하인사를 얼마나 받게 될지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다.


뵌 적도 없는 그분의 합격이 내 합격만큼이나 기뻤다.


합격의 순간은 생각만큼 드라마틱하지도, 환희로 가득하지도 않았다. 한참을 그저 멍하니 명단 속 내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떨리는 손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합격했어


정말 무던하게, 너무도 침착하게 합격의 소식을 전했다. 분명 나는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는데, 볼 위로 시큼한 눈물이 타고 흘렀다. 심장 저 끝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벅차다는 표현이 아마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일까? 상투적 표현 그대로, 그간의 수험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mbti를 검사하면 압도적으로 외향성 수치가 높게 나오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병이 나는 사람. 늘 새로운 새로운 활동, 새로운 장소, 새로운 자극에 목이 마른 사람. 사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도 나는 제주도에서 모 방송사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촬영을 마친 후 서울로 막 올라온 참이었고,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유럽으로 가는 한국 홍보대사 활동에 지원을 하기도 다.

1. 마치 운명처럼,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선 합격자 발표 바로 전 날 탈락을 했다. 하마터면 내가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올 뻔했잖아... 혹시나 촬영 중에 합격 여부를 확인했는데 떨어졌으면 어쩌지,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별 생각을 다했다. - 확신의 N...
 
2. 유럽에 공짜로 보내주는 홍보대사 활동을 위해 2차 시험을 한 달 앞둔 채 서류 전형을 준비했다. 그리고 2차 시험 딱 일주일 전 면접을 봤고, 무려 시험 딱 이틀 전날 밤 합격통지를 받았다. 만약 불합격했다면 멘탈에 영향이 컸을 것 같다. 합격해서 참 다행이야...


그 당시 나의 에너지와 관종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내가 회계사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과 가족들은 모두 나를 말리기 바빴다.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년의 수험기간 동안 나는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고, 일주일에 딱 하루 휴식일을 제외하고는 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500원짜리 구립 독서실로 향했다. 그 좁은 독서실에서 나는 매일 뛰쳐나가는 꿈을 꿨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힘들다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소영아, 정말 수고했어. 너무 자랑스럽다.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간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참으로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날. 10년이 지난 지금도 눈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떨림. '이제 내 인생 모든 역경은 끝났어, 멋진 꽃길만 이어질 거야'라고 착각했던 그때, 나는 고작 23살이었다.


지금은 대중에 합격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합격자 명단이 신문에 버젓이 공개되었던 시절이었다.


원본은 잃어버려서 흑백으로만 남은 합격증서


시험 응시 첫해에 1, 2차를 모두 합격했다. 이걸 '초시동차'라 하는데, 전체 수험생 중 1% 쯤 된다나?(속닥) 그래서 끄트머리에 소심하게 자랑해본다. 내 평생의 자랑이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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