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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15. 2021

내 책상이 사라졌다.

떠돌이 달팽이의 삶도 꽤 괜찮다.


학창 시절에도, 수험생일 때도 나는 늘 책상을 알록달록 정성 들여 꾸미곤 했다. 내 책상에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따위의 오글거리는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었다. 직장인이 되면 좀 시크하게 책상을 꾸미고 싶었다. 음.. 예쁜 화분도 하나 놓고, 가습기도 놓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 사진들도 몇 개 붙여놓으려 했다.

그런데 책상이 없다.


당황스러웠다. 책상이 없는 직장생활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법인마다 조금 다르지만, '안진회계법인'은 one IFC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각자 개인 공간을 가지는 대신  '호텔링 시스템'을 도입했다. 출근을 하면 호텔링 시스템에 접속해 빈자리를 예약하고, 퇴근할 때 퇴실 처리를 하는 방식이다. 각자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은 한 칸의 '사물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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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당시의 그 어색한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근무를 시작할 당시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었고(입사는 2011년 12월에 했지만, 졸업은 2012년 8월에 했다.), 회계법인 소식에 어두워 정식 지원을 못했던터라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입사를 했다. 동기들보다 입사가 조금 느리고, 교육이나 워크숍도 가지 못 회사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비서분에게 호텔링 시스템을 안내받고 빈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던 중 오후 느지막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장 내일부터 송파구에 있는 <kb저축은행>으로 나오라는 통보였다.


네? 송파구요...?.. 자.. 잠실..?


안진회계법인에 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안진이 '여의도'에 있다는 점이었다. 금융의 중심 여의도! 삐까뻔쩍한 마천루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우뚝 선 IFC 건물을 또각또각 걸어 다니는 내 모습 상상만으로도 너무 멋졌다. 게다가 본가인 영등포에서 택시로는 단 10분, 버스로도 네 정거장이면 올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첫날 이후 나는 약 한 달 가까이 IFC에 단 한번 발을 붙이지 못한 채 계속 잠실에 갇혀 있었야만 했다. (출퇴근 리얼 hell이었음 ^^)

나는 전공이 중문과였고, 학회나 동아리도 전부 마케팅 관련된 것들만 해서 주변에 회계사 선배가 단 1명도 없었다. 내게 회계사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이렇게 책상도 없이 떠돌이처럼 일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다.


회계사는 클라이언트사 사무실을 '필드'라고 부른다. "다음 주 필드는 어디야?", "이번 필드는 잠실이야" 이런 식으로. 많은 자료를 받고, 담당자와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회계사는 클라이언트 회사의 사무실로 출근하고, 그곳에서 마련해준 공간에서 일을 한다. 그래도 대부분 쾌적한 회의실을 사무공간으로 내어주시지만, 회사 여건에 따라 때로는 먼지 가득한 창고 같은 곳에서 일을 할 때도 있다.


이렇게 매일 매일 일하는 공간이 바뀌다 보니 회계사들은 항상 모든 짐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마치 제 덩치만 한 집을 영차영차 짊어지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내 검은색 노트북 가방 안엔 늘 두꺼운 thinkpad와 각종 서류들, 그리고 화장품이 가득 차 있었다. 지난주엔 잠실로, 이번 주엔 종로에서, 다음 주엔 서초에서 일하는 것이 익숙했다.


노트북 가방을 멘 퇴근길. 저렇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도 구두를 신고 다녔다니..


책상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디든 노트북만 펼치면 회계사에겐 그곳이 사무실이다.


1년 차 때 선임 회계사님이 해주신 말이었다. 사실 이 말은 '집에 가서도 사무실처럼 계속 일을 해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나는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내가 눕는 곳이 침대요, 밤하늘이 이불이다'라는 낭만적인 문구가 떠올랐다.  


알록달록 꾸밀 책상은 없지만, 나는 그 보다 더 알록달록 강한 색깔을 지닌 회사들에서, 수많은 사무실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일했다. 퇴사할 때 뽑아온 이력사항을 보니 내가 근무했던 필드가 무려 76개나 되더라. 76개의 필드. 멋지지 않은가? 나는 76개 회사의 조직문화나 업무방식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다. 아무리 이직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도 그 어떤 직업도 이토록 많은 사무실에서 '직접' 일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사실 이 점이 너무 힘들어 회계법인을 그만두고 일반적인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필드가 동서남북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출퇴근 시간도 늘 다르고, 당장 한 달 뒤 내가 어디서 일할 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 떠돌이 같은 삶이 좋았다. 책상이 없기에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좋았다.



p.s. '책상이 없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유'와 '다양한 필드 경험이 주는 이점'은 정말 너무도 많기에, 천천히 후술 하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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