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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15. 2021

현실과 이상 사이, 나의 출장 첫 경험

출장, 어디까지 가봤니? - 1 -

현실과 이상 사이, 나의 출장 첫 경험

20대 초반, 햇병아리 회계사였던 나는 출장이 참 좋았다. 사주에 역마가 끼어 여행과 맛집 탐방이 거의 유일한 취미였는데, 출장이야말로 회삿돈 쓰며 공짜로 먹고 자는 여행이 아닌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멋진 슈트에 서류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그래서 인차지(In-charge, 팀장 역할) 선생님들을 만나면 무조건 붙잡고서 "저 출장 보내주세요!!"를 외쳤다. 그땐 몰랐지, 왜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몇 번이나 내게 진심인지를 되물었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회계사들의 출장은 참으로 녹록지 않아서 숙취와 피곤으로 얼룩진 채 시체처럼 일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게 출장의 '참' 모습이었다. 지방 분들은 인심이 후하여 저 멀리 서울에서 내려온 회계사 슨상님들을 쉬이 대접할 수는 없다며 항상 우리를 이곳저곳 끌고 다니셨다. 그리고 우리의 팀장님들은 영업을 하시는 건지, 영업을 당하시는 건지, 이 자리를 즐기시는 건지, 괴로워하시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지방의 유흥에 마음껏 취하셨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출장에서 3차까지 가는 것은 다반사. 4차로 포항 앞바다에 돗자리 깔고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다 다들 만취하여 밀물에 엉덩이가 축축해진 것을 몰랐던 때도 있었다. 마! 이게 회계사들의 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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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는 또 어떠한가. 나는 출장을 가면, 5성급 호텔에 묵으며 가운 입고 셀카 찍고, 욕조에 거품 푼 채로 와인 한잔 때리며 하루를 마무리할 줄 알았다. 현실은 '비즈니스호텔'이라 쓰고 '모텔'이라 읽히는 곳에서 만취한 채로 노트북을 켜서 오늘 못다 한 일을 끄적이다 잠드는 것이었다.


어쩌다 부산이나 울산과 같은 대도시로 여행을 가면 그나마 괜찮은 가격에 롯데시티호텔이나 신라스테이 같은 곳에서 쾌적하게 묵으며 나름대로 꿈꾸던 출장 허세를 부려볼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어쩌다', '운이 좋은' 경우였다. 서울에만 살며 관광지로만 다니니 잘 몰랐지만, 지방의 관광 대도시들을 제외한 소도시들엔 5성급 호텔 자체가 없다. 4성급도 없어... 3성급 찾기도 쉽지 않아...


내가 생각한 출장지 모습 vs 나의 현실...


나의 첫 출장지는 천안이었다. 입사 후 두 달여 후 2월 즈음에 가게 됐던 출장.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회계법인의 2월은 정말 지옥 그 자체다. 몸은 하나인데 여기저기 중복 어싸인이 되어 서로 스케줄 조정을 하느라 난리통이 따로 없다. 그래서 당장 다음 주, 아니 당장 내일, 내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불확실한 시기다.


맞다. 그래서 나의 첫 출장은 하루 전에 결정됐다. 그것도 아주 오후 느지막이, '내일 2박 3일로 천안 출장을 가야 한다'는 다급한 전화 한 통으로... 심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 선임과 단둘이 가게 된 출장이었다.

야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여자 비율이 20% 미만인 회계법인에서 사실 남녀 단둘이 출장을 보내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하지만 워낙 바쁜 시기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경우...


낯선 분과의 출장이 조금 어색할 것 같아 걱정은 됐지만, 그렇게 꿈에 그리던 첫 출장이 아닌가. 피곤한 와중에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업무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와서 읽을 책 몇 권과 마스크팩, 향이 좋은 입욕제를 챙겼다. 그리고 출장지에서의 업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택시가 번쩍이는 모텔촌으로 향하자 나는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터미널 근처였던가, 사방이 화려한 불빛의 모텔로 가득 찬 모텔 촌. 태어나서 그렇게 모텔이 밀도 있게(?) 많이 모여있는 곳은 처음 봤다. 이곳으로 이미 출장을 많이 왔던 선임 회계사님은 익숙한 듯 미리 골라놓은 모텔로 걸어가셨고, 나는 그 뒤를 쭐래쭐래 따라갔다. 출장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찼던, 갓 24살이 된 나에겐 다소 당황스러운 풍경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본 적이 없었다. 깔끔한 숙소이긴 했지만 모텔 특유의 그 음침한 듯 어두운 조명과 습기 가득 꿉꿉한 느낌이 달갑지 않았고, 욕조가 있긴 했지만 입욕제를 풀어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대학 시절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도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지냈고, 혼자 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던지라 낯선 곳에서 '나 혼자' 자는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푹신푹신 푹푹 꺼지는 침대도 왠지 어색했다. 나중엔 이러한 모텔 숙박에도 익숙해져 내가 나서서 좋은 모텔을 검색하고(밝은 조명과 깔끔함 필수), 모텔에서의 출장 라이프도 즐기게 되었지만, 그날은 참 잠도 오지 않더라.

3년차에 썼던 글. 모텔에서 월풀을 하고, 일출을 보며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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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밖으로 나오는데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엘리베이터에도, 모텔 현관에도, 그 모텔촌(?) 거리 곳곳에도 정장 차림에 노트북 가방을 둘러멘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안엔 생각보다 아주 많은 외감 대상 법인이 있고, 모두 비슷한 시기에 감사를 받는다. 그러니 회계사가 많을 수밖에.. 눈이 마주치면 나 혼자서 '너도 회계사구나.. 오늘도 고생해'라는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갑자기 원인모를 뿌듯함과 당당함이 생겼다.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서 '첫날밤(?)'을 무사히 보내고 '진짜 회계사'가 되었다는 생각. 그랬다. 아직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거다..



to be continued...




천안 출장간다고 천안삼거리 흥얼거리던 나... 철이 없었죠... 호두과자때문에 천안 출장을 좋아했다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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