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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19. 2021

장기출장의 늪

출장, 어디까지 가봤니? - 2 -


6년 간 법인 생활을 하면서 나는 출장을 징하게도 많이 다녔다. 국내에 공항 몇 개 있는지 아는 사람..? 국내에는 무려 14개의 공항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중에 인천과 김포, 제주, 김해공항 정도 가봤겠지만, 나는 포항, 여수, 진주/사천 그리고 울산공항까지 총 8개의 공항을 가봤다. 사실상 김포에서 출발하는 모든 국내선 공항에 가본 셈이다. 어떤 공항은 너무도 작아서 그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하나도 없는 공항도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출장은 비행기가 아닌 차량이나 기차로 이동하고,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지역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신기한 건 비행기가 항상 만석이라는 것... 평소보다 몇 시간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는데, 버스에 사람이 가득 찼을 때 느끼는 그 감정과 동일하다. 세상은 넓고 여기저기 일하는 사람은 참 많구나.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던 비행기표. 포항공항도 진주공항도 모두 일하면서 처음 가봤다.


어떤 부서에 있는지에 따라, 어떤 프로젝트를 주로 하느냐에 따라 출장의 빈도수는 매우 달라진다. 내 첫 부서는 주로 금융기관 감사를 담당하는 '금융감사 본부'였다. 클라이언트 중 상당 수가 서울에 있는 은행이나 증권사였기에 출장이 많은 부서는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동기들에 비해선 출장을 꽤 자주 가는 편이었는데, 주로 소규모 회사들이라 출장기간은 보통 일주일 남짓이었다. 월요일에 내려가서 열심히 일한 후 금요일에 올라오는 식이었고, 연달아 출장이 생기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부서였던 <구조조정 본부>는 상황이 좀 달랐다. 구조조정 본부에서 하는 M&A나 실사 프로젝트는 결코 일주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본부 내에서 출장이 비교적 없는 팀에 속해있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출장을 가면 짧게는 3주, 길게는 몇 개월까지도 출장이 이어졌다.


내가 연속으로 가장 길게 가 본 출장은 두 달이었다. 말이 두 달이지, 두 달간의 타지 생활은 정말 사람의 심신을 지치게 한다. 매주 짐을 싸고, 매주 2번의 비행기를 타야 했다. 다행히 출장지가 대도시라 숙소도 좋았고(롯데시티 호텔에 묵음), 팀원 분들도 훌륭해 나름 즐겁게 생활했지만, 한 달이 넘어섰을 때부턴 몸 구석구석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마음 안 맞는 팀원분들과 꾸리꾸리한 모텔에서 두 달을 생활해야 한다면?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두 달 정도 출장으로는 '워크아웃팀' 앞에서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워크아웃팀은 우리 부서뿐 아니라 법인 전체에서도 출장이 많고, 일이 빡세기로 유명한 팀이었다.) 워크아웃팀은 한번 출장이 시작되면 기본이 3개월, 중간에 조금의 휴식기가 있긴 하지만 6개월이 넘는 출장도 허다했다. 배우자나 자녀가 있다면 이건 뭐 생이별이나 다름없다.


꽤 친하게 지냈던 워크아웃팀의 차장님 한 분은 결혼 후 한 달도 안된 상태에서 연속으로 4개월의 출장을 다녀온 후 바로 퇴사를 하셨다. 이유인즉슨 본인 몸이 힘든 건 괜찮은데, 어느 날 출장이 끝나고 새벽에 돌아왔더니 아내 분이 울면서 이혼을 요구하셨다고 한다. 결혼하자마자 사실상 주말 부부가 된 데다 서울에 와서도 주말에 또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있으니, 아내분도 서러움이 터지셨던 거다.

다행히 그 후 성공적으로 이직하셔서 아내 분과도 잘 살고 계시지만, 당시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언제 갑자기 출장이 시작될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불안할 수 밖에...


심지어 워크아웃팀은 아파트를 장기 임대해서 합숙하듯 생활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생전 처음 가 보는 타지에 만날 사람이 있을 리 없고, 할 일도 딱히 없으니 매일 정말 술만 마셨다더라. 야근 후 회식하고, 또 숙소로 돌아오면 거실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수명 짧아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다.


오죽 출장이 많으면 대한항공 국내선 이용만으로 모닝캄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모닝캄의 조건은 대한항공 탑승 횟수가 40회 이상이어야 하는데, 국내선은 0.5회로 계산한다. 그러니 즉 국내선만으로는 80번의 비행을 해야만 모닝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매주 2번씩 비행기를 탔다면 무려 열 달이 걸리는 수치다. 그래도 모닝캄 자격 하나 남았다며 씁쓸하게 웃으시던 모 부장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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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은 당신, 자신 있는가? 회계법인 내에서 본인의 커리어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지만, 어떤 프로젝트를 맡게 될지 어떤 팀에 합류하게 될지는 선택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모든 직장이 마찬가지겠지만, 회계법인에서의 생활은 정말 팀바팀, 케바케다. 워크아웃팀에서 미친 출장 일정을 소화하는 회계사도 있지만, 1년에 출장을 1-2번 갈까 말까 한 회계사들도 많다.


하지만 철저하게 본인의 운빨에 맡겨야하는 문제이고, 일반적으로는 약간의 빈도 차이일 뿐 출장 자체를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만약 낯선 잠자리, 때로는 청결하지 못한 침대에서 잘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회계법인 입사를 조금 신중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좋다.



너무 무시무시한 이야기만 계속했으니, 다음 글에선 출장지에서의 즐거운 기억들과 출장이 주는 이점들을 좀 풀어볼게요. 사실 저는 "가끔" 1-2주 정도 기간의 출장은 꽤 좋아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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