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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20. 2021

고단한 출장에도 행복은 있다.

출장, 어디까지 가봤니? - 3 -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추억을 많이도 쌓았다.

모든 회계사들이 출장을 꺼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출장지에서만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즐거움과 금전적 이익이 있기에 출장을 선호하는 회계사들도 꽤 있다.


우선, 출장 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식비와 교통비, 숙박비는 법인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 법인마다 다르지만 우리 법인 기준 숙박비 한도는 1박 10만 원이었고, 그 금액이 조금 넘는 곳에서 숙박해도 문제 된 경우는 없었다. 평일 숙박인 데다 관광지가 아니라 1박 10만 원이면 웬만큼 괜찮은 숙소는 구할 수 있, 대도시라면 롯데시티호텔이나 신라스테이 같은 비즈니스호텔에서의 숙박도 가능하다.

확실히 괜찮은 숙소에서 지내면 출장피로도가 훨씬 덜하다. 헬스장도 잘되어 있어 운동도 가능하고, 밀린 업무 하기에도 괜찮은 환경.


그리고 지방 출장을 가는 경우 '회사 돈으로' 혹은 '클라이언트 사의 돈으로' 매일 저녁 그 지역의 유명 맛집 뽀개고 다닐 수 있다. 내가 구태여 힘들게 검색하지 않아도 클라이언트 사 분들이 알아서 로컬 맛집으로 척척 데려가 주시고, 추천도 많이 해주신다. 예컨대 포항에 가면 과메기와 물회를 먹고, 전라도에 가면 홍어 맛집을 가고, 이천에 가면 한정식 맛집으로, 대구에 가면 유명 막창집으로 가는 식이다.


사실 맛집에 큰 흥미가 없고 술도 싫어한다면, 이건 출장의 장점이 아니라 큰 단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원체 맛집을 좋아하는 먹보였고, 술도 어느 정도 즐기는 편이라 그 지역만의 특산물을 맛보고, 로컬 식당들을 다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물론 진상 클라이언트가 있거나 알코올 중독자 급의 상사가 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지만, 구조조정 부서에서의 출장은 감사부서보다 훨씬 편했다. 클라이언트 없이 우리끼리 저녁을 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자유롭게 쉬거나 따로 식사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4년 차쯤부터 줄곧 팀에서 제일 연차가 높았기에 내가 가고 싶은 맛집을 가고, 술도 안 마실 수 있어(원하는 사람만 원하는 만큼) 출장길 더욱 즐거워졌다.

원래 내규 상 1인 식비 한도금액이 있긴 하지만, 식비로 지적하는 상사는 거의 없다. 회식이나 접대가 원체 많은 데다 출장은 다들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관대한 분위기. 그렇다고 투뿔 한우나 다금바리 같은 거 먹으면 좀 곤란하다.


출장 시에는 1일 3만 원의 '퍼디엠'이라는 것도 지급된다. 출장 위로금(?) 같은 건데, 4박 5일의 출장을 가면 5일 치인 15만 원을 별도로 입금해 주는 것이다. 출장지에서의 고생에 비하면 너무 약소한 금액이지만, 한 달 출장 시 월급과 별도로 세후 60만 원의 금액이 통장에 꽂히게 되니 왠지 공돈 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내 피와 땀을 갈아 넣어 번 돈이지만...


특히 시즌 때는 서울에서도 어차피 매일 야근하고 가혹한 업무량을 감당해야 하기에 그럴 바엔 지방에 내려가 퍼디엠을 받는 것이 낫다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특자취러들의 경우에는 출장 기간 동안 아끼는 식비와 교통비, 생활비, 거기에 퍼디엠까지 고려하면 꽤 쏠쏠한 금액이 될 수도 있다. 

회계법인 생활은 항상 케바케 팀바팀임을 기억하자. 숙박비 한도와 퍼디엠이 더 적은 법인들도 있고, 더 많은 법인들도 있다. 내가 근무하던 당시에는 퍼디엠이 1일 2만 원이었으나, 얼마 전 3만 원으로 올랐다는 제보를 받고 내용을 수정하였다. 퍼디엠이 높아지면, 출장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위로가 될 것 같다.


더불어 서울에서 일할 때는 잘 만날 수 없는 지방 친구들과의 교류도 가능다. 나는 인간관계가 얕고 넓은 편이라 지방에도 친구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출장지가 정해지면 항상 그 지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저녁 약속을 잡았다. 회계사분들은 안 그래도 피곤한 출장에서 무슨 친구를 만나냐며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나에겐 그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부산처럼 지인이 많은 곳으로 출장을 가면 친구에게 픽업을 부탁해 필드 근처를 벗어나 해운대 등에 가서 밥을 먹었다. 물론 다음날 밀릴 업무가 걱정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여행 온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울산 출장을 갔을 때엔 그 지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이 4명이나 있어 내 숙소 근처로 한데 모 술을 마시기도 했다.


포항에선 한동대에 다니는 친구가 필드로 놀러 와 점심을 같이 먹었고, 그쪽 지역으로 출장 온 지인을 만나기도 했다. 또 군대를 독도로 간 후배가 마침 휴가를 나왔다가 포항에서 배를 타고 다시 들어간다기에 시간을 맞춰 맛있는 저녁을 사주기도 했다. 이천에 출장 갔을 땐 하이닉스에서 일하는 지인을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칠곡에 갔을 땐 대구에 내려와 있던 친구와 술 한잔을 하기도 했다.


생각나는 것만 대충 적었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추억이 있다. 서울에서 일할 땐 각자 바쁘다 보니 지방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타지에서 만나면 정말 더없이 반갑고 애틋하. 몸은 피곤해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밥 한 끼가 고단한 내 출장에 정신적 위로가 되어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친구들을 만났고, 나를 위해 선뜻 시간을 내어준 친구들이 참 고마웠다.


출장 자체가 정말 피곤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의 출장은 도시에서 벗어난 휴식이 되어주기도 한다. 출장지에선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빼곡한 다이어리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도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갑작스러운 호출이나 자질구레한 잡일에 불려 갈 일도 없다.


<삼일저축은행> 감사를 위해 매 분기마다 포항으로 일주일 씩 출장을 갔는데, 일은 고지만 포항이 참 좋았다. 필드 근처의 바닷가로 숙소를 잡고선 밤새도록 조개구이를 까먹으며 동료 회계사님들과 노닥거리고, 새벽에 일어나선 일출을 봤다. 마음 맞는 여자 후임 선생님과 함께했던 어떤 출장지에선 장어를 배불리 먹고, 근처 유명한 찜질방에서 같이 삶은 계란을 까먹기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일출보기, 그 지역에서 유명한 찜질방 가기. 모두 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출장지에서의 추억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계속되는 출장 때문에 몸이 힘들어 엉엉 울었던 때도 분명 있었다. 그래도 나는 피할 수 없는 출장을 즐기기 위해, 고단한 출장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좋아하는 맛집을 가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돈으로도 살 수 없는 추억을 참 많이도 쌓았다. 모두가 나와 같을 순 없겠지만, 피할 수 없다면, 자신 만의 행복을 찾아 슬기로운 출장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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