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푼젤 Dec 27. 2021

출장지 황당 사건 Best 5

출장, 어디까지 가봤니? - 부록 -


숱한 출장을 다니며 참으로 많은 흑역사를 쓰고, 황당한 일들을 겪었다. 당시엔 정말 끔찍하다 여겼던 사건들도 있지만, 기억 속에서 날카로운 부분이 깎이고 미화되어 이제는 그저 즐거운 추억거리일 뿐이다.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를 늘어놓는 게 조금은 이해도 된다. 내가 이만큼 고생했었다는 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거기에 갖은 고초를 겪어낸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한 스푼 섞였달까?


사실 따지고 보면 크게 대단한 일들은 아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들을 몇 가지 꺼내보았다. 쓰다 보니 결국 다 모텔의 특수성(?)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다.


1) 혼숙은 안돼요.

경기도 어드메 공장으로 출장을 갔는데, 주변에 편의시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깡시골이었다. 회사분들이 추천해주신 숙소들을 몇 곳 가봤는데, 이건 뭐 모텔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여인숙..? 같은 곳들이라 검색에 검색을 거쳐 꽤 괜찮아 보이는 모텔을 하나 찾았다.


저녁도 못 먹은 상태로 숙소를 4-5곳 돌아다 온 터라 그 모텔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들 너무 지친 상태였다. 어차피 더 이상 가볼 곳도 없을 것 같아서 '3명, 4박이요'를 외치고 쿨하게 계산을 했다. 보통은 짐을 풀고 식사를 가는데, 클라이언트 분들이 계속 우릴 기다리고 있 상태여서 카운터에 캐리어만 맡긴 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때 꼼꼼히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정신없고 지쳐서 결제금액도 확인하지 않고, 밥을 먹으러 간 것이 화근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꽤 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와 아까 맡긴 캐리어와 방 키를 달라고 했는데, 엥? 키를 하나만 내어주시는 것이 아닌가?


"어.. 저기.. 저희 3명인데요."

"네~ 그 방 3명 숙박 가능한 방이에요"

"????"


정말 셋 다 벙쪄서 서로 쳐다보다 실소가 터졌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출장 시 기본적으로 1인 1실을 사용한다. 같은 성별끼리도 당연히 함께 자지 않는다. 보통 공장들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의 모텔들을 가면 우리 외에도 많은 출장객을 받기 때문에 알아서 1인 1실을 내어주시는데, 여긴 우리가 어디 여행이라도 온 사람들인 줄 알았나 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장에 노트북 가방, 누가 봐도 출장객인데...


심지어 우린 남자 둘에 여자 하나(=나)였던 상황. 방을 2개 추가해달라고 했더니 지금 방이 딱 1개밖에 남지 않았단다. 우릴 태워주신 원 분도 이미 집으로 돌아고, 이 밤 중에 다른 모텔을 찾아 나설 자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자 두 분이 한 방을 쓰시고, 내가 남은 다른 방을 쓰기로 했다. 다음날엔 당연히 방을 하나 더 추가했지만,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 두 분께 너무 죄송스러웠다.


그 이후로는 꼭 '3명이요'가 아니라 '방 3개요'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2) 바뀌어버린 모텔 방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다녀왔더니 모텔 방이 바뀌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클라이언트 없이 우리끼리 먹는 저녁이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다 풀어헤쳐놓은 채 식사를 다녀왔는데, 모텔 사정으로 방을 다른 곳으로 바꿨단다. What???? 내가 없는 사이, 내 속옷이며 화장품이며 짐을 모두 만져 다른 방으로 옮겨놨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기분 나쁜 사건.... 시골로 출장을 다니다 보면 정말 별 일을 다 겪는다.


출장을 다니다 보면 이런 황당한 사건 뿐 아니라 아주 다양한 인테리어의 모텔들을 마주하게 된다. 도시와 거리가 좀 있는 모텔일수록 모텔 주인분의 취향이 진하게 반영다. 알록달록한 인테리어의 모텔들은 오히려 양반. 방 한 쪽 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병풍에 스산한 그림이 그려져있던 모텔도 있었고, 침대 옆에 성경이 놓여있는 곳도 있었다.


3) 잊지 못할 4개의 다리

울산에 있는 ****호텔에 묵었을 때 겪은 일이다. 방에 키를 둔 채 편의점에 다녀온지라 카운터에 가서 새로운 키를 요청했다. 아무렇지 않게 카드키를 찍고 방 문을 열었는데, 뭔가 기운이 이상했다. 뚜벅뚜벅 침대로 걸어 들어갔는데, 침대에 다리 4개가 있었다. 악!!!! 소리를 지르고 황급히 뛰쳐나왔다.


알고 보니 출장 첫날이라 방 번호를 명확히 외우지 못한 내가 잘못된 번호를 말한 것이었다. 카운터 직원은 다른 사람의 방 키를 본인 확인도 안 하고 그냥 내게 쥐어줬던 것... 나보다 그 방에서 자고 있었던 분들이 더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 당시엔 나도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그분들께 사과도 제대로 못 드렸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내 방에 그런 식으로 들어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출장 지 모텔에선 잠긴 문도 다시 보고, 추가 잠금장치도 꼭 하자.


4) 낮에는 비워주세요.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 사건(?)은 안성에 있는 한 골프장으로 출장을 갔을 때 터졌다. 골프장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위치하기에 괜찮은 모텔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좀 걱정을 했다. 그런데 웬걸? 썩 괜찮아 보이는 모텔들이 아-주 많이 검색망에 걸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많은 모텔들이 모두 만실이라는 것!..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검색과 많은 전화 끝에 4개실이 비어있는, 시설 좋은 모텔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4박 숙박은 곤란해요. 낮에는 비워주세요"

"네????"

낮에는 대실 손님을 받아야 해서요.
연속으로 숙박을 하시려면 숙박료의 3배를 지불하셔야 해요.


보통 우리는 숙박업소들에게 꽤나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1인 1실을 하고, 일찍 나가고 늦게 퇴근하고, 모텔에선 정말 잠만 자기에 더럽게 쓸 시간 자체가 없다.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시켜먹는 경우도 거의 없고, 기껏해야 맥주 한 캔 마시는 정도? 게다가 출장이 길어지면 3-4주씩, 혹은 몇달까지도 장기 숙박을 하기에 오히려 숙박료를 할인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할인은커녕 숙박료를 3배 지불하라니? 너무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모텔 주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모텔들의 대실료와 숙박료는 큰 차이가 없고, 대실 시간을 채우지 않고 일찍 퇴실하는 손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기까지 빈 시간 동안 대실을 몇 번 더 돌리는 게 금액적으로 더 이득일 수 있다.


하지만 3배의 숙박료는 법인 규정을 훨씬 넘어서는 금액인데다, 아무리 법카라고 해도 그런 비합리적인 계산을 마냥 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우린 고민 끝에 매일 아침 짐을 싸 캐리어만 카운터에 맡기기로 했다.


당시 4명의 일행 중 나는 유일한 여자였고, 당연히 내가 짐이 제일 많았다. 남자분들은 셔츠 몇 개, 속옷 몇 개 챙겨 오는 게 전부였지만, 나는 여자들 중에서도 좀 유별난 편이라 늘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맥시멀리스트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단한 상태로 각종 화장품과 옷가지들을 다시 싸 내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게다가 숙소에 돌아오면 지울 수 없는 그 찝집함... 방금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침대에서 뒹굴었을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추가 요금을 사비로라도 내거나, 이불을 싸들고 다니고 싶었지만, 유별난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봐 꾹 참고 2주를 버텼다.


누군가 숙박업에 관심이 있다면, 꼭 골프장 근처로 알아보길!


5) 죽음의 수협

위 네 가지 사건들은 모두 내가 겪은 일이지만, 이 마지막 이야기는 수협 감사팀 분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우리 부서에선 '수산업협동조합'의 감사를 맡고 있었는데, 본사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전국 곳곳의 단위수협으로 직접 감사를 나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흑산도라던가 주민도 몇 없는 생전 처음 듣는 지역으로 출장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 자체에 숙박시설이 없어 이장님 댁이나 마을회관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술고래 어부분들이 따라주시는 술을 마시다 기절해버려 뭍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 여자 회계사님은 딴섬이장님 댁에서 잠을 자야 했고, 그 방의 잠금장치가 부실해 문고리를 잡은 채 잠이 들었다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기도 했다. 마을의 어떤 청년(?)이 그 여자 회계사님을 좋아해서 마을 분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둘을 이어주려해 매우 곤혹스러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다행히 그 정도까지 외진 곳으로는 출장을 간 적이 없었다. 모텔도 힘든데, 이장님 댁에서의 숙박이라니... 저런 일을 직접 겪는다면 정말 멘붕이 올 것 같은데, 그러한 일들을 이겨낸 분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

회계사가 되면 깔끔한 사무실에 앉아 노트북펴놓고 숫자놀음만 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 물론 그런 삶을 사는 회계사도 많지만, 어떤 회계사들은 1박 2일 조연출 부럽지 않은 다이내믹한 출장을 가기도 한다.


모험을 즐기는 ENFP분들.. 출장 전문 회계사를 꿈꿔보시는 것 어떠신가요?



p.s. 내가 이러려고(?) 회계사 됐나!!! 싶었던 순간들도 참 많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출장은 아주 평범하고 무난하게 지나갔다. 6년 간의 무수한 출장들 중 저건 worst로 뽑힌 경험일 뿐이니까.


아마 나보다 더한 경험을 한 분들도 있을테고, 깔끔하고 무난한 출장만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100명의 회계사에겐 100가지의 삶이 있다.


제발 출장보내달라고 징징거리던 그 소녀는 3년 후 출장헤이터가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단한 출장에도 행복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