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 읽는 라푼젤 Jan 29. 2023

윤리도 진화한다.

후안 엔리케스 <무엇이 옳은가> 서평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 많은 이가 인간이 인간을 소유해도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사악한 관행이 왜 갑자기 산업혁명 직후에 사라지기 시작한 걸까?


이 책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 중에서 가장 나를 당황시킨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얻은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 때문이었다는 것. 듣고 보니 참 그럴싸한데,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용인되었던 노예제도의 처참한 현실과 그로 인한 잔재들을 읽고 들으며, '어떻게 저런 비윤리적인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분노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노예제도를 비윤리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학습과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가 보다 더 윤리적인 인간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가는 기술과 윤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윤리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1,000마력짜리 기계 한 대가 사람 1,000명 몫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노예제도라는 관행을 포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산업화를 거친 영국이 노예제도를 가장 먼저 폐지한 국가라는 점, 그리고 산업화를 이룬 미국 북부와 달리 농업에 의존했던 미국 남부가 마지막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는 점은 단순히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기술은 윤리를 바꾸어놓고, 오래된 믿음들을 향해 문제를 제기하며, 더 이상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제도들을 뒤엎는다.

생각해 보니 담배도 그렇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 때부터 담배를 피웠고(실제로 온 백성이 담배에 중독되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유럽에서는 담배가 전염병을 막아준다는 믿음이 강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를 피워댔다고도 한다. 하지만 의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담배가 암을 유발할 수 있고, 간접흡연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되었다.


물론 윤리의 변화는 기술의 발전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소수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과거에도 노예제도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고, 담배연기가 불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분위기였거니와 내더라도 금방 묻혀버렸겠지.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지만, 불과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동아리방이나 과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고학번 선배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아무리 기술이 변화하고 법과 제도가 바뀌어도 시민의식이 따라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변화가 우리를 더 윤리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내게 신선하고 충격적인 시각이었다.


일찍이 맹자가 한 말 중에 無恒産無恒心(무항산 무항심)이라는 말이 있다. 항산(일정한 생산)이 없으면 항심(일정한 마음)도 없다,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는데 이 명언이 떠오르더라. 이 책에서 말하는 '항산'은 바로 '기술의 발전'이 아닐까?


진화니 유전자니 신경과학이니 하는 주제들에 대한 지식이 점점 더 많이 쌓이면서 우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 생명체를 바꿔놓는 도구들을 개발하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전자편집에 관한 내용이었다. 임신 4개월 차에 들어서면서 며칠 전 기형아검사(정확히는 다운증후군 등 염색체질환 선별검사)를 진행했기에 더욱이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임산부들은 4개월 차가 되면 초음파 검사를 통해 태아의 목덜미 투명대 두께를 측정하고, 채혈 검사도 시행한다. 그리고 이 간단한 기형아검사에서 만약 기형에 대한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판명되면 아주 비싸고, 유산의 위험이 있는 대신, 보다 정밀한 검사의 시행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그 검사에서 다운증후군 등 염색체질환을 최종 확진받게 되면 부모는 소파수술(낙태 수술, 선택적 유산)을 선택할 수 있다.


산모의 나이가 점차 고령화되면서 여러 인터넷 카페에서는 다운증후군이나 애드워드 등 염색체 질환 확진 판정을 받은 후 선택적 유산을 택하거나 실제로 출산을 해낸 부모들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까운 내 지인 중에도 유전적 질환으로 낙태를 선택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요즘은 꽤 흔한 일이 되었다. 만약 다운증후군으로 판정이 된다면 그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인가, 아니면 선택적 유산을 하고 다시 건강한 아이를 임신할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며칠 전 진행한 검사에서 고위험군이라는 결과를 받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땐 막연히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만 생각했었고, 당연히 낙태는 매우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몇 달 동안 몸에서 귀하게 품은 아이를 감히 어떻게 강제적으로 낙태시킬 수 있을지 쉬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소파수술을 선택한 부모를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염색체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와 부모가 짊어져야 할 고통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유전자편집이 비윤리적이며 세상의 다양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너무 많은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반대한다. 현재의 의학과 과학기술로는 유전자 편집은 불가능하여 다운증후군 등 염색체 질환을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낙태 또는 출산 외에는 부모에게 주어지는 선택지가 없다. 만약 의학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유전자 편집이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치명적인 '질병'에 한해서만큼은 유전자편집을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낙태보다 유전자편집이 훨씬 더 윤리적인 방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테니 말이다.

 

목청 높여 '윤리'를 말로만 떠드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선택적 유산과 유전자편집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 하지만 제 아무리 생명윤리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아이에게 유전적 질환이 생긴다면, 수천 수억 원을 들여서라도 그 질환을 고쳐내고 싶어 할 것이다. 사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무도 비윤리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그것을 사전적으로 고치는 것은 어째서 윤리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사후적인 치료보다 사전적인 치료(유전자 편집)가 효과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유전자편집을 허용하게 되면(그만큼 기술이 발전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질병의 치료뿐 아니라 더 큰 키와 더 높은 IQ, 더 우수한 유전자를 원하게 될 것이고, 여러 가지 사회적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부작용을 컨트롤해 내는 것은 법과 제도, 성숙한 시민의식의 몫일 것이다.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의학 기술이 발전하기를 소망하게 되지만, 나 역시 기술의 발전으로 급변해 갈 우리 사회의 모습이 너무도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주 솔직히는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때때로 겁이 나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지 않았으면,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향후 더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사회가 될까, 아니면 더 엄격한 도덕적 판단이 지배하는 구속적인 사회가 될까?


이 책은 이렇게나 어려운 주제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놓고, 아무런 결론도 내주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미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교수도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주제들인 것이다. 다만 저자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이 주제로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할 것을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과거 우생학을 주장했던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무식해서라거나,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 위한 악질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겸손을 잃은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는 예측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더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변화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윤리적 기준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윤리 기준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귀 기울이는 겸손한 자세와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2023년 1월 28일, 첫 번째 낭독회
[발제문] by CSY, CYJ

1. 책의 전체 소감은 어떠한가. 기술이 윤리를 바꾼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2.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가 바뀌었던 경험이 있는가, 어떤 것이었고 왜 바뀌었는가.

3. 책을 관통하는 질문들을 같이 나눠보자. 인간의 재설계, 유전자 교정 편집에 대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나 (장애인, 우주에 갈 수 있는 사람, 똑똑한 아이)

4. 사이코패스의 뇌, 강제로 바꿔도 될까? (누가, 어떤 기준으로?)

5. 과거 윤리의 문제였던 이슈들을 짚어보자. 결혼 아닌 동거, 낙태(임신 중지권)

6. 디지털 문신-현재는 옳았는데 미래에는 옳지 않아지는 기록들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에 과오를 범했던 사람이 현재는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데, 과거영상을 올려서 그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7. 동성애의 결혼 합법화에 찬성하는가.

8. 저자는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겸손'한 태도와 덜 비난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이 결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