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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Feb 23. 2024

내러티브의 함정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서평


지금은 사회화가 많이 되었지만, 어릴 적 내 성격은 지금보다 더 독선적이고 말랑하지 못했다. 어디에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분명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성격은 아니었음에도 내가 학창 시절 12년 동안 단 한 해도 빠짐없이 학급반장으로 선출되고, 심지어 전교회장을 맡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서기 좋아하고 주목받기를 즐기는 성격이 뒷받침되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나는 '그럴듯한 서사를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들이 나를 신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럴듯한 서사를 잘 만들어낸다'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잘 포장한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한 없이 게으르지만 부지런한 척도 잘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인간이지만 따뜻한 척도 잘한다. 매사에 열정이 넘치는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든, SNS에서든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교묘하게 속이고 꾸미는 데 능하다.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와중에 나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나는 사기꾼인 걸까? 어떤 것이 진정한 내 모습인지,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인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흔히 외치는 클리셰처럼 '진정 나 다운게 뭔지' 늘 궁금했다.


자아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해 내가 말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다양한 변형을 할 수 있고 여러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우리는 모두 여러 존재가 되어 기능적인 정체성과 관계를 서사적으로 함께 형성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내면에서 연극을 하는 원숭이 무리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의 출처로서 타인이 매우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 우리가 가진 유일한 출처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원숭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타인의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믿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수-많은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공감하고 위로받은 이야기는 바로 '자아'에 대한 부분이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서사적 자아'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자아'라는 것이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내 삶의 작가이면서 또 독자인 '나'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직접 전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듣고 표현해 내는 그 서사 과정에서 비로소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말한다. 결국 '나만의 이야기'들이 모여 '나'가 된다는 것.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천방지축 딸에서 효녀로 자라난 성장 서사를 가지고 있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또 전혀 다른 성격의 로맨스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스며든 사연과 서사는 셀 수 없이 다양할 터이니,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는 수많은 여러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다.


연한 파란색과 진한 파란색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우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변할 때 ‘오, 뭔가 완전히 바뀌었어’라고 인지하는 반면, 두 색상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영어권 사람들의 뇌는 놀라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보는 TV프로그램 '나는 솔로'의 제작진들은 출연진들에게 영수, 영철, 광수, 영숙, 옥순, 현숙 등 다소 촌스러운 닉네임을 부여한다. 처음엔 모든 이름들이 분명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았었으나, 지금은 이름마다 내포하는 뉘앙스와 이미지가 생겼다. '옥순'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에게는 눈길이 한번 더 가고, '광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떤 스마트함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생긴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 다른 행동을 하거나 걸맞지 않은(?)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는 더 큰 반감이 일기도 한다. 아마도 제작진은 애초에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매 회 일관된 가명을 사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와 유사한 무수한 사례와 실험결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러티브와 언어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생각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물을 기억하고 사건을 판단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말이다. 파란색을 두 가지로 구분해 내는 용어가 있느냐에 따라 색을 인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특정 단어가 여성 단어인지 남성 단어인지에 따라 사용되는 수식어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심지어 각자의 언어적 특징에 따라 같은 사건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세부 내용을 다르게 기억하기도 한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같은 상황에서 범죄를 '야수'라고 표현하는지 '바이러스'라고 표현하는지에 따라 지지하는 조치가 달라지며 입장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이라 할지라도(ex. 오바마 케어)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원치 않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그 의도가 곡해될 수 있다. 그렇기에 정치인들은 단어 하나의 선택에도 신중하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피부색’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인지 격차가 다시 재생산 및 강화되며, 사람들을 배제하고 평가 절하한다. 말하자면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고려해야 할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이러한 모든 내러티브가 ‘피부색’이라는 눈에 띄지 않는 단어에 담겨 있다. 언어는 이러한 식으로 차별하는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괴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인 힘도 가지고 있다.


2001년 8월 대한민국의 국가인권위원회는 '살색'이라는 표현이 인종 차별이라는 한 시민의 청원을 받아들여, 한국기술표준원에 색 이름을 바꿀 것을 권고했다. 2002년 11월 한국기술표준원은 기존의 ‘살색’이란 표준 관용색 이름을 '연주황'으로 바꿨고, 2004년 8월 초중등학생 6명이 연주황의 이름을 쉬운 한글로 바꿔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2005년 5월에 다시 '살구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최근에는 가부장제의 잔재인 성차별적 단어들을 변경해서 부르자는 움직임도 지속되고 있다. '도련님', '아가씨'와 같은 호칭 대신 OO 씨로 전부 통일하고, '유모차'는 '유아차'로, '시댁과 처가'는 '시가와 처가' 혹은 '시댁과 처댁'으로 바꾸자는 것 등이다. 이와 관련해 작년 말 한 유튜브 예능에서는 출연진이 '유모차'라고 발음한 것을 제작진이 '유아차'로 표기하여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리 삶은 자원과 권력으로의 접근을 체계화하는 몇몇 조작적 내러티브에 의해 결정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적대자인지를 분류한다. 그리고 권력과 불의를 아주 믿을 만하게 미화시켜서 우리 사회의 토대가 사물의 질서에 대한 정교한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가 더 이상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굳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를 입에 잘 붙지 않는 단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단어 자체보다는 단어에 담긴 의도와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여러 사례들을 보다 보니 특정 단어가 가진 힘이 생각보다 꽤 강력하게 느껴졌다. 바뀐 단어가 사람들의 의식에도 조금씩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색'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살구색'으로 바뀐 것은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스타킹을 검색할 때 무의식적으로 '살색 스타킹'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익숙해진 단어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하지만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살구색'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이 예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표현이라는 점을 적어도 '인지'한다는 것. 습관으로 인해 아직 사용은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살구색 스타킹'을 검색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지금은 SNS에서나 일상에서 '유아차'라는 단어를 쓰면 '페미니스트'라고 공격받거나 괜스레 예민한(?)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워 일부러도 그 표현을 피하게 된다. 평소 SNS에 가벼운 일상 글을 쓸 때도 내가 쓰는 단어가 특정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닐지 검열을 할 때가 많다. 특정 커뮤니티에서 상대 성별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제스처가 광고에 등장했다는 이유로(실제로 그 제스처를 의도했는지와는 별개로) 불매운동이 일어나거나, 어떤 연예인이 특정 커뮤니티의 은어(ex. 오조오억 개)를 사용했다며 갖은 고초를 겪는 것을 무수히 봐왔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세계에서 빠르게 확산 중인 '여성혐오 내러티브'의 영향이거나 우리나라에서 늘 유행 중인 '편 가르기(?) 내러티브'의 영향인 것 같다.

우리 삶에서 각종 내러티브가 생존욕구와 함께 진화해 오면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해 왔는지를 느끼게 된 만큼, 이러한 내러티브의 속임수와 어른동화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종종 무의식적이고 거의 본능에 따라 작동하는 이러한 부족 사고는 부족 문화나 생존의 필요성을 넘어서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는데, 오늘날에는 이를 ‘부족주의 Tribalism’라고도 부른다. 부족주의는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순수한 형태로 관찰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파시즘 등 인종 관련 내러티브와 여성혐오 내러티브를 비롯하여 다양한 내러티브를 설명/비판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부족주의' 내러티브다. 다소 무서운 이야기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이 울면 슬픔을 느끼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어 그 슬픔에 공감하고,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이 울면 이득을 느끼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어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sns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한 부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sns 상에서 '좋아요'를 받으면 부족원(?)으로 인정받았다고 느끼며 소량의 도파민이 분비되는 반면, 누군가가 나의 정체성과 엮여 있는 것을 비판하면 공격받는다고 느끼고, 몸에서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분비되어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고 한다.


'일베'니, '디씨'니, '여시'니하는 특정 커뮤니티에 갇힌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부족주의 내러티브에 강하게 지배받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가장 뚜렷하고 선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별'이라는 정체성 아래 유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고한 온라인 부족마을을 만든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추천과 좋아요로 나타나는 공감을 받으며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커뮤니티에서의 생활을 통해 결속을 더욱 강화해 나가면서 상대방의 의견은 우리 부족에 대한 공격이라 간주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러한 특성을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기 위해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잘못된 결속을 해체하고 사회를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우리에게 얼마나 더 강력한 내러티브가 필요할까?

같은 mbti를 가진 사람끼리(예전에는 혈액형) 동질감을 느끼고, 유사한 특성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관련 콘텐츠에 좋아요를 던지고, 공감하는 것도 부족주의 내러티브의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정말 부족주의 내러티브에 강하게 지배되는 민족인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는 진정한 영웅 여정을 제공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주인공, 동맹자, 멘토, 적대자의 형식으로 게임과 매우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동시에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게임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예전에는 주인공의 영웅적 행동을 이야기할 때 연대기를 사용했다면 오늘날 소셜 미디어 사용자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타임라인, 인스타그램의 하이라이트를 사용하여 직접 자신을 이야기한다.


스마트폰의 발달 덕분에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초강력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는 한 명의 영웅스토리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영웅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다. 유명 연예인의 값비싼 tv광고보다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던 일반인의 피드 한 장이 더 강력한 힘을 갖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결국 '인플루언서'들은 현시대의 흐름에 맞게 발전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프레젠테이션 전문가들일 것이다.


정돈된 보고서와 잘 짜인 PT가 왜 중요한가. 결국 강력한 스토리가 사람의 마음을 이끈다. SNS 속 가상세계에서든 현실 세계에서든, 나만의 내러티브와 나만의 영웅여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어려웠던 책. 좋은 내용들도 많았지만, 너무 곁가지가 많아서 읽고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작가님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으신 것 같음.... 초강력 이야기꾼, 아니 이 시대의 진정한 多변가십니다 ~~ 


2024년 2월 23일, 스물네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LYK2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서사'라는 장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양한 2차 문헌들과 사회실험 및 연구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많은 참고문헌들의 내용과 형이상학적인 개념어들의 의미를 전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인간을 '이야기하는 원숭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탄탄한 학문적 근거와 실증적 사례가 존재한다는 점은 차고 넘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일 때 스스로 납득 가능한 서사를 창조하여 저장한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정보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래, 축적되고, 인간 사회가 고도화됨에 따라 집단적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다양한 영웅신화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신화들은 현대에서도 그 외피만을 바꾼 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탄생으로 인하여 개인은 서사의 수용자가 아닌 창조자로서 활동하며, 강력한 서사들은 더욱 손쉽게 전파되고 강화됩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수많은 서사들은 의도와 목적 하에 교묘하게 왜곡되고 윤색된 채 세상을 쥐락펴락 하고 있습니다. 종교, 자본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나치즘, 음모론 등 인류의 역사를 좌우한 '서사'들은 사실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진실성과 신뢰성보다는 얼마나 대중의 관심을 끄느냐에 따라 서사의 힘이 좌우된다는 수많은 사례들은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1. 같은 메시지도 '어떻게', 즉 어떤 서사에 실어서 전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드라마 등 전통적인 서사작품에서부터 상품 광고, 정치적 프로파간다 등 우리 주변에서 '효과적인/강력한 서사'라고 생각되는 사례가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


 2, 이 책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각 개인이 자신의 서사를 과시하는 장으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고 합니다. SNS에 게시된 나의 서사와 실제의 나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SNS 가 나의 자아정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나요?


3. 이 책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서사가 의도된 내러티브를 품고 있음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음모론으로 경도되기도 합니다. 정당한 비판 및 이성적 의심과 반민주적인 음모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4. 9장은 현대사회의 남녀갈등에 대해서도 서사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남성적 영웅서사에서 유혹, 복종, 모성 등의 역할만을 부여받았던 여성들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자 여성혐오 내러티브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급진적인 남성혐오/여성혐오의 원인과 대응책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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