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밴스 <힐빌리의 노래> 서평
가난은 사회적 차별, 모욕, 억압이고 기회와 정보로부터의 단절이다. 가난은 희망의 부재, 목표 설정의 어려움이며 때로는 인간성의 파탄에까지 이른다.
내가 오하이오에서 자라며 평범한 공립 고등학교를 다녔고 우리 부모님이 대학을 안 나왔다는, 내게는 그저 지루한 이야기에 대해 교수님들과 동기들은 진심으로 신기해했다. 나와 같은 배경을 지닌 사람을 예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해병대 복무도 오하이오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으나, 예일에서는 최근에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군인과 말을 섞어본 친구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사회적 자본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사회적 자본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성공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 인생이라는 경주에 뛰어들게 된다. 나와 같은 부류의 아이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주변에 귀감으로 삼을 만한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은행장이어서 저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거든요. 저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렇게 세상에 노출이 돼야 꿈을 품을 수 있어요.”
상위 절반은 '주말반'이었고, 하위 절반은 '평일반'이었다. 그 당시에는 왜 상위권 학생들은 주말에 학원을 다니지...? 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좋은 고등학교에 다녔기에 평일에는 강제 야자에 참여하거나 과외를 받고 주말에만 학원에 올 수 있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야자가 없었고, 3-4시면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우리 학교같이 학부모들의 반발이 없는 학교들이 시범학교로 지정되었던 것 같다.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능력은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 내가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이다. 해병대는 외과 의사가 종양을 도려내듯 내게서 그런 마음을 도려냈다.
빈곤 계층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그럭저럭 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생계를 꾸려나갔고 열심히 일하면서 형편이 나아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소수라고 해도 여전히 많은 숫자인 빈곤자들은 기꺼이 실업 수당에 의존해 살아갔다.
엄마보다 고작 9개월 어린 이모는 할모와 할보가 최악의 부모였던 시기를 엄마와 함께 지켜봤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는 최악의 정반대 편에 놓인 상황으로 빠져나왔다. 이모가 해냈다면 엄마도 할 수 있어야 했다.
가난에서 탈출한 이들은 가난에 머물러있는 패잔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노력했고, 벗어났기 때문이다. 노력의 최대치는 제각각이다. 총량이 같을지라도, 누구는 엔진이 고장 났을 수도, 흡기통이 꽉 막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개중엔 정말로 자기의 최선을 얕잡아 생각한 채로 가라앉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불안정한 상황을 방패삼아대충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보통의 사람들이, 가난한 이를 감고 있는 올가미를 또는 그의 발에 묶인 닻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 왓챠 'David'님의 코멘트에서 발췌-
(너무 공감 가는 코멘트라 발췌하였다,)
주변에 한부모가 많은 환경에서 자라거나 이웃들이 거의 빈곤층인 가난한 동네에서 살다 보면 실제로 가능성의 영역이 좁아진다. 할모나 할보처럼 바른 길로 잡아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또한 교육을 받고 열심히 노력했을 때 어떤 결실을 맺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의미다. 아울러 나나 린지 누나, 게일 이모, 제인 렉스, 위 이모가 행복을 좇을 수 있었던 모든 요소가 빠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행운아였는지 조금씩 깨닫게 됐다. 나는 지구 최대의 강대국에서 태어나 문명의 이기를 누렸다. 다정한 두 힐빌리 노인의 지지를 받으며 자랐고, 별난 면이 있는 가족들이긴 했어도 그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누구라도 내 삶의 방정식에 변수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엉망이 됐을 것이다.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성공한 다른 사람들도 내가 겪은 것과 유사한 형식의 개입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발제문] by LYK2
1. 이 책은 백인 노동계층의 소외를 복합적인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보수적이고 거친 힐빌리 고유의 문화, 수렁과도 같은 가난, 가정의 붕괴와 폭력,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채 불안과 비관을 먼저 배운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 실천의 의지도 없이 가난을 대물림합니다.
우리 주변은 어떠한가요? 우리 사회에서 가난과 소외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힐빌리들처럼 가난과 결핍 속에서 무기력과 절망을 학습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나친 풍요 속에서 노력과 열정을 잃고 패배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제적 형편은 나아졌지만 주변과의 끊임 없는 비교, 당연히 주어지는 물질적 풍요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스스로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대로 작은 실패에도 더 크게 좌절하는 나약함 등 소위 MZ세대의 특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할모와 할보의 사랑과 지지는 저자를 비참한 환경에서 날아오를 수 있게 했지만,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이 독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풍요, 무관심과 무제한적 허용, 어떤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나요?
3.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시한 ‘아비투스(Habitus)’는 경제적, 사회적 계층과 환경, 종교, 문화, 직업, 학력, 이전 세대로부터 축적된 경험 등이 축적된 개인의 생활 양식과 취향, 습성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힐빌리’로서의 아비투스와 ‘예일대 로스쿨’의 주 류를 이루던 사람들이 공유하던 아비투스의 차이를 깨닫고,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을 느낍 니다. 많은 노력을 거쳐 계층 이동을 이루었으나, 태어나서 수십 년간 무의식 속에 축적된 경험과 유 산들은 여전히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점, 그리고 매 순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점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비투스의 차이나 경제적, 문화적 계급 차이 등을 느낀 적이 있나요? 이를 받아들이거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
4.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사라진지 오래고, 개룡남/녀 는 멸칭이 되었으며, 금수저 아니면 벼락부자(코인투자자, 유튜버 등)만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시 대입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J.D.밴스의 이야기는 먼 미국 땅 애팔래치아 힐빌리의 아메리칸 드림 신화일 뿐일까요?
불평등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메시지에 대한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