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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Oct 30. 2024

희석되지 못한 고통 속에서

한강 <채식주의자> 서평

[스포주의]


새벽에 아이가 우는 소리에 깨어났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작가의 흡인력 있는 필력 덕에 밤새 책을 읽고 다음날 마음에 생긴 열병으로 몸살이 나버렸다.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어 10만 원을 주고 링거 3대를 때려 맞아야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세상은 대체 왜 이런 책을 좋아하는 걸까, 기괴한 것만이 예술일까, 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던져댔다.


나는 사실 이런 류의 책을 매우 싫어해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다. 조금 촌스럽고 유치하더라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외치는, 알록달록한 책과 영화를 좋아한다. 왓챠피디아에서 내가 별점 5점(만점)을 매긴 영화 중 과반 이상은 애니메이션일 정도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이나 폭력성을 다룬 영화를 보면 몇 날 며칠 마음의 병으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떡하나. 세상은 그리 알록달록하지도,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은 것을. 인간은 고통 속에 태어나 눈 감는 그 순간까지 고통과 싸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그러니 읽을 수밖에. 모른 척한다고 모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나를 위해 나아가는 수밖에.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작 중 주인공인 '영혜'는 어릴 적부터 무수히 많은 폭력 아래 굴종하며 살아왔다. 아비로부터 받은 물리적 폭력 외에도 그녀의 삶에는 수많은 폭력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 것이다. 그러다 어떤 꿈을 계기로 - 무엇이 도화선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 그녀의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수많은 분노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상처 입히고 똑같이 발길질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무서워서, 견디기 어려워서, 자꾸만 분노가 목구멍에 걸려서, 그녀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채식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남편과 가족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강요와 폭력을 행사한다. 아비는 억지로 그녀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고, 다른 가족들은 방관한다. 그리고 정신병동에서 그녀는 동박새 하나를 물어뜯어 버린다.  


런데 과연 그녀 어땠을까. 그녀가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듯이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폭력을 행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식칼을 집어 들어 손목을 그었을 때, 그녀가 상처 낸 것은 그녀 자신뿐만이 아니다. 가족의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어린 조카들에게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남편의 손을 먼저 놓은 것도 사실은 영혜였다. 손과 발과 이빨과 세치 혀와 눈이 존재하는 한, 어쩌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고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지도.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도, 도움을 청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소리 없이 우는 것이다.

달래듯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엄마새였구나.
지우는 그녀의 가슴에 묻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봐, 엄만 여기 있잖아. 하얀 새로 변신하지 않았지?

강아지처럼 젖은 아이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편협한 시각을 가진 평민으로서, 나는 작가의 심오한 작품 세계를 오롯이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어린이인 '지우'의 존재에서 나는 '희망'을 읽었다. 가족의 분열과 여동생의 정신병, 남편의 끔찍한 외도와 범죄 등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도 인혜는 끝내 삶을 선택해 낸다. 만약 지우가 없었더라면, 영혜에 대한 알량한 책임감으로 과연 그녀가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박명 속으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게서 그녀가 결국 뒷걸음질 쳐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지켜야 할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끔찍한 고통의 세상으로 그녀가 기어이 끄집어 놓은 존재, 그래서 무한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신 같은 그런 존재가 그녀에게 있었다. 결국, 고통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것은 사랑뿐 걸까.

 

 ……어쩌면 꿈인지 몰라.
...(중략)...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이 끔찍한 소설이 영혜 혹은 인혜의 긴 긴 꿈이기를 바란다. 때로 현실은 소설이나 한낱 꿈보다도 훨씬 잔혹한 법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밤 지우가 꾸는 꿈이 아름다운 무지갯빛이길, 지우가 충만한 사랑 안에서 단지 희석된 고통만을 느끼며 자라길 바라본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일한 아이의 이름이 내 아이의 이름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아팠다. 마지막 문단 속 '지우'는 소설 속 지우이기도, 내 아이 지우이기도 하다.


2024년 10월 26일, 여섯 번째 낭독회♥


[자유형식 발제]

1. 책을 읽은 전체적인 느낌. 노벨문학상을 탄 이유는 뭘까.

2. 가장 인상 깊은 대목 or 나누고 싶은 부분.

3. 한강은 인간의 폭력성을 다룬다. 우리는 무엇을 폭력적이라 느끼며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4. 한강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던 걸까?


그 외)
예술의 경계, 표현의 자유, 성에 대해.
"갑자기 변한다"에 대한 경험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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