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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은 낭만적이기 때문에 실용적일 수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 <소셜 애니멀>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인류의 번영은 의식보다 한 차원 아래에 있는, 무의식적 사고 과정의 결과물이다.


나는 내가 늘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인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한 번도 인생에 있어 '큰 그림'을 그려본 적도, '어떻게 살고 싶다'라고 마음먹어본 적도 없었다. 대학교에서의 전공 선택도,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도 모두 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결정된 일들이었다. 그래서 왜 중문과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이나 어쩌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럴듯하게 포장하느라 애를 먹는다. 방송 출연이나 퇴사 결정, 결혼 결심까지. 인생의 항로를 바꿀 중요한 결정들도 어떤 논리적인 계산에 의해서 결정했다기보다는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내키는 대로 질러버린 것들이었다.


예컨대 회계원리와 재무관리 수업을 듣다가 그냥 재밌어서, 그 직업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건지도 모른 채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강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해본 적 없던 상황에서 '강의할만한 사람을 찾아달라'는 지인의 제안에 '내가 직접 해보고 싶다'며 카메라 앞에 서버렸다. 섭외전화 한 통에 아무 생각 없이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을 감행하고, 꿈꿔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람과 결혼하고, 또 어쩌다 보니 지금은 가구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가슴에는 머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여러 논리가 있다.


나는 내가 의도하거나 목적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라 생각했지만, 이 책에서는 나의 모든 결정들이 사실 무의식이 계획(?)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이끈 것이라고 말한다. 의식과 이성은 나중에 무의식의 선택을 그럴싸하게 설명하고 해석할 뿐이라는 것.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어떤 브랜드를 선택할 때도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무의식적 단서와 정서적 기억 등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에리카가 어느 날 밤 산책을 하다 자신만의 컨설팅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에 휩싸여 해리슨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이 표면적으로는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떠나야 할 때를 알려온 그 '직감'은 단순히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간 쌓여온 수많은 경험과 감정에 기반하여 그녀의 머리가 따라올 수 있도록 마음이 강렬하게 움직여낸 것이었다. 내가 '감정적으로', '내키는 대로' 결정했던 것들이 사실은 논리적 계산을 앞세운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 합리적이고 올바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게는 꽤나 큰 위안이 되었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얘기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거든요. 호호)


줄리아는 사랑에 빠질 것이고, 자기에게 왜 이런 심리적인 변화가 생겼는지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그날 줄리아와 롭은 방랑자가 되어 자기들의 삶에 가장 풍성한 보상을 안겨다 줄 길을 걸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나는 얼마 전까지 내가 푹 빠져있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떠올랐다. 마치 <폭싹 속았수다>의 사회과학서 버전을 읽는 것 같았달까? 드라마가 애순이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딸 금명이 또 딸을 낳기까지의 삶을, 딸로서,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조명했던 것처럼, 이 책은 '헤럴드'와 '에리카'의 삶을 현대 심리학과 각종 사회과학 이론들을 적재적소에 풀어헤쳐 놓으며 설명해 낸다. 헤럴드와 에리카의 탄생부터 성장, 좌절, 사랑, 그리고 죽음까지 - 그 모든 이야기에 푹 빠져 읽다 보면 첫인상 이론, 애착관계이론, 마시멜로 실험 등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온갖 심리학 이론과 실험들이 총출동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사회과학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인지, 소설에 빠진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헤럴드와 에리카는 매력적인 성격을 가졌고, 궁금한 배경을 가졌다. 그리고 뛰어나지만 또 마냥 그렇게 뛰어나지만은 않은, 어디에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물이다. 나 역시 에리카에게서 수많은 '나'를 발견하며 공감했다. 만약 두 주인공 헤럴드와 에리카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매료되지 않았더라면, 감히 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이 사회과학책의 완독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에리카는 한 가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만일 환경을 바꿀 수만 있다면 완전히 다른 계기와 무의식적인 문화의 지배를 받게 될 터다. 내면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게 더 쉽다. ‘환경을 바꾼 다음에는 새로운 계기들이 작동해 효과를 발휘하도록 맡기자’고 에리카는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14살의 철없는 에리카는 어린 시절의 나와 참 많이 닮았다.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뒤쳐지면 씩씩거리며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과 준거집단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했던 일탈, 남들보다 아주 조금 나았던 점이 결국 나의 자의식과 정체성의 핵심이 된 점과 어린 시절에 생긴 실존적 불안이 야망의 밑거름이 된 점이 모두 그랬다. 그리고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고 정보를 나르는 '접착제'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결심한 것도, 결국 '성취'가 아닌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도 - 모두 나와 똑 닮았다고 느껴졌다. 저자가 내 삶을 들여다본다면 다음 책의 주인공으로 내 이름을 쓸 정도로 기뻐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이것도 자의식 과잉일까?ㅎㅎ

특히 '에리카는 모든 것이 올바르지 않으면 참지 못했다.'는 문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


인간의 마음은 낭만적이기 때문에 실용적일 수 있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친구가 인생의 목표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진정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모두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명확히 깨닫지는 못했으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히치 블라인드 미팅>이라는 이름으로 한두 달에 한 번씩 8대 8 미팅을 조직해서 진행하고 있다. 일회성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며칠 전 무려 10번째 행사를 마쳤다. 남녀 참가자 8명씩 도합 16명 중 최소 10명에서 12명을 매번 내가 조달(?)하고 있는데, 정치인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가진 사람도 아닌 내가 매번 그 많은 인원을 모으는 것이 쉬울 리 만무하다.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데다 그 사람들의 지갑까지 열어 적지 않은 참가비를 내게끔 만들어야 한다. 펑크가 나거나 급하게 사람을 구해야 할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읍소하는 것도 일상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이걸 하느냐, 어떻게 이걸 해내느냐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돈이 되기는커녕 매번 마이너스라는 이야기를 하면, 다들 더더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그냥 좋고 재밌다. 매번 16명의 사람을 만나고, 64개의 만남을 지켜보는 것이. 지금껏 10번의 파티를 진행했으니 중복 참가자를 제외하더라도 약 150명 이상의 사람과 나는 또 '관계'를 맺은 셈이다. 결혼 후 바빠서 or 이성인 친구를 멀리하느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교 친구나 옛 회사 동료들을 불러들여 근황을 묻고, 친구의 SNS를 통해 자주 보았거나, 친구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했던 '친구의 친구'와 히치를 통해 진짜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내 친구들을 남편에게 소개해주고, 또 남편의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일 역시 크나큰 즐거움이다.


한 사람의 뇌는 두개골 안에 담겨 있는 하나의 물질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네트워크, 즉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게 '관계'에 중독되어 살고 있으니 그 어떤 능력보다 '사회적 기술'과 '공감능력', '유대감' 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책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은 무작정 많은 관계를 맺으라고 말하는 책은 결코 아니고, 진정한 유대와 사랑, 의미 있는 연결과 관계가 삶을 완성시킨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지만. 150명이라는 숫자를 떠나 나는 모든 참가자에게 순도 100% 진심이었다. 남편과 내가 함께 유대를 쌓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과 깊은 연결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지금처럼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진정 내 삶을 스스로 의미 있다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비범한 성공과 행복으로 이끄는 것은 재능과 지능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며, 이는 인간 본성에 의한 결과이다.


이 책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자기계발서임과 동시에 내게는 귀중한 육아 지침서이기도 했다. 아이가 타고난 기질을 어떻게 개발시켜야 할지, 내 아이가 난초라면 어떻게 난초가 활짝 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궁극적으로 나는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부모가 되어줄 것인지 등에 대해 책을 읽으며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지우가 똑똑하지 않아도, 아이큐가 낮아도, 별다른 재주가 없거나 공부를 못해도 정말 다 괜찮을 것 같다. 다만 지우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기꺼이 사랑받을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기를, 사랑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그 가운데서 깊고 아름다운 관계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보다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결국 인간을 비범한 성공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말을 믿는다. 내 삶이 그랬던 것처럼.


KakaoTalk_20250921_233658129_02.jpg 2025년 7월 1일, 마흔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MBK

1. 책에서 인간의 행동과 의사결정의 대부분이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차적 인식 과정인 무의식이 2차적 인식 과정보다 중요하며, 무의식은 주관적이어서 정보를 고지게 아니라 액체처럼 다룬다고 했습니다.

“감각, 지각, 충동, 욕구 등이 한데 뒤엉킨 것이었다. 우리가 무의식이라는 비정한 용어를 동원해서 부르는 바로 그것이었다.” (p.611)

-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선택을 할 때 스스로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 결정이 감정이나 경험, 분위기 등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느낀 적이 있나요?

- '무의식’은 우리의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2. 모든 선택 뒤에는 결정의 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무의식적인 구조 집합체, 이른바 ‘선택 구조물’이 있다고 합니다. 선택 구조물은 흔히 ‘어림짐작’이라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사람의 정신에는 ‘만일 ~라면, 그때는 한다’라는 경험에 바탕을 둔 어림짐작들이 저장되어 있다가 특정한 맥락 속에서 활성화되며, 이것은 적절한 환경에서 불쑥 튀어나와 문제를 해결합니다. 어림짐작에는 닻 내림 효과, 프레이밍 효과, 기대 효과, 관성 효과, 각성 효과, 손실 회피 효과가 있습니다. (p.297 ~ 301)

- 6개의 어림짐작 효과 중 여러분이 경험해 보거나 관찰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3. 배우자 후보를 고를 때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고른다고 합니다. 수천 년 동안 개발된 유전자와 축적된 문화 덕분에 남자의 신뢰성을 감지하는 여자의 무의식적인 능력은 놀랍도록 발달했다고 합니다. 에리카가 배우자 후보군에서 제외시킨 남자는 버버리 옷을 입은 남자, 스펠링을 정확하게 쓰지 않은 남자, 향수 냄새를 풍기는 남자, 스포츠와 관련된 액세서리를 하고 다니는 남자였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싱글이라는 가정하에 배우자를 고른다면, 배우자 후보에서 꼭 걸러야 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4. 두 주인공 중 해럴드는 사랑받으며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라지만 약간 소극적인 면이 있고, 에리카는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지만 강한 추진력과 불타는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특정한 기질이 있는 채로 태어나지만 이것은 하나의 사슬일 뿐이고,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었습니다.

- 여러분의 어린 시절은 지금의 가치관이나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 가정환경과 유년기의 경험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 인간은 자라온 환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5. 기존 삶에는 유년기, 청년기, 성인기, 노년기의 4가지 단계가 있었는데, ‘오디세이기’, ‘활발한 은퇴생활기’ 2가지 단계가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오디세이기는 청년기와 성인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10년의 기간이며, 성인기는 4가지 특징(부모 집에서 나와 공간적 독립, 결혼하기, 가정 꾸리기, 재정적 독립)으로 규정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오래 살며, 성인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등 여러 가지 현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p.312)

- 추가된 2가지 단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여러분의 ‘오디세이기’는 어땠으며, ‘활발한 은퇴생활기’는 어땠으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 나눠요.



6. 에리카가 은퇴 이후, 대학교 친구 ‘미시’를 만났을 때 미시가 명상을 하며 느낀 ‘자기 인식’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내 감정들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들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고 둥둥 떠다니는 걸 관찰하게 됐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하나의 경험일 뿐이라는 것, 그걸 깨달아야 해. 그건 너를 통해서 일어나는 감정들이야.” (p.563)

미시는 ‘자아’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감정과 경험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흐름’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믿는 생각과 감정조차도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내가 겪는 것’이라는 관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 여러분은 평소에 감정이나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나요? 아니면 그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느끼시나요?

- 감정이나 생각이 ‘나’가 아니라 ‘나를 거쳐 지나가는 경험’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방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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