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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Mar 01. 2020

탁월한 사유의 시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자세

모든 창업자는 철학자다.

작년에 스타트업 책을 여러 권 읽으며 느꼈던 점이다. 창업자는 자신의 철학을 따라 삶을 보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주체다. 나도 나만의 철학과 주관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게 아닌 나의 생각과 목표대로 '끌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철학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한다. 책의 초반에는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주도하지 못하고 따라가기만 하는가. 선진국들처럼 경제성장은 따라잡았지만,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국가인가'라고 따끔한 질문을 던진다. 이지성 작가의 <에이트>에서도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무감각하게 매일을 맞이하다 보면 4차 혁명이라던가 인공지능, 미래 기술 등은 내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러나 지성인들이 이토록 '우리는 늦었다. 우리는 흐름을 만들지 못한다. 창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울부짖는 건 우리가 조금 더 예민해져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훈고하여 창의하라

옛것을 익히고 지식을 쌓는데에서 멈추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나만의 사유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저자가 계속해서 비판하는 것은 철학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그는 우리가 그저 철학자들의 이론을 외우고 공부하는 데에서 멈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상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나왔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들이 가졌던 시선의 높이를 동일하게 체득하는 것이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항상 시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해서 고도의 추상적인 이론으로 구조화한 체계다. 하나의 철학이 생산될 때에는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이론이 함께 붙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수입될 때는 시대적 맥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들어온다. 특히 우리에게는 그 현상이 더욱 심하다.

철학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 모든 철학은 시대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하는 사상이 아닌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선을 지녀야만 그 안에 독자적인 생각이 피어난다. 

철학은 그 ‘내용’ 자체로 규정된다기보다는,
‘사유’ 즉 살아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차원의 시선이다. 그리고 철학적 차원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끌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자 철학적 삶이다.

예전에는 깊은 대화를 하는 것을 꺼렸다. 별생각 없이 해야 할 것을 하며 살아갔기 때문에, 즉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갔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들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주관을 가질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에 그걸 일깨워주는 시간들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년부터 꾸준히 독서를 하고는 아직 하~안~참(30초 숨 참고 말할 정도로) 멀었지만 조금씩 생각의 텃밭에서 조그마한 싹이 군데군데 자라나기 시작했다. 1년의 부지런한 독서가 황량한 텃밭에 어느 정도 거름을 주었는데 올해 말에는 내년에는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훈고하여 창의하라'에서 현재는 훈고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후에 다가올 단계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전략적 높이에서 사유하라

하나의 지식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해서 재사용하거나 거기에 몰두하고 빠져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하거나 효용성을 따지는 대신 그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따지고, 그것이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작동과 활동성을 보려고 한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둘 중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지식을 습득할 때의 자세도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 그저 지식을 재사용하거나 활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맥락과 세계에서의 영향도를 보어야 한다. 보다 부지런해야 하는 지식 습득 방법이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활동을 정리해보면 이런 식일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 내용을 습득하는 데서 나아가 책이 쓰인 배경과 작가의 의도를 간파한다. 독자를 '나 혼자'가 아닌 세상으로 확대하여 책의 영향력에 대해 상상해본다.

주로 내용을 습득하고 독후감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전까지의 나의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확장해야 한다. 저자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욱 각성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한국 독자들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 책이 몇 명의 한국인들이라도 더 각성시킨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잠재력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언택트 시대가 더 빨리 도래했다. 온라인 마트에서 장을 보고, 결제할 때도 비접촉 결제수단을 선호한다. 은행 호텔 등은 비대면 서비스들을 늘리고 있다.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 외에 어떤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을까. 요즘 2030은 소셜살롱 서비스를 선호하고, 나도 독서모임을 이용하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개인적인 영역을 중시하지만 그럼에도 타인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 소개팅 어플처럼 지인 기반이 아닌 알고리즘에 의해 무작위로 매칭 되는 시스템을 통해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백신 없는 바이러스가 성행하는 상황에서 타인이 어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달가울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고, 접촉을 통해 온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택트 시대에는 이러한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례적으로 수많은 재택근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정과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아직은 질문만 던질 수 있다. 대답을 떠올리면 '잘 모르겠다, 그런 현상이 증가하겠지'라는 추상적인 답만 떠오른다. 많이 공부하고 자주 생각해서 나도 나만의 답을 찾고 싶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을 지성적으로 튼튼하게 하는 일이다. 모든 철학적 자산은 독립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철학을 통해 자신이 튼튼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높은 시선’이다. 높은 차원의 활동성이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튼튼해진 사람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고 새로운 빛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에 진실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 철학적 시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발현된다.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발현되는 높이의 시선, 그것이 지성적 시선이고, 그 지성적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방식이 바로 철학이다.



나는 독립적 주체로 살아가는가

책을 읽다가 멈칫했던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 고유하게 읽은 질문은 아니지만, 가끔 독서하다 이런 문장을 발견하면 멈칫하곤 한다.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 삶을 산다. 꿈이 없는 사람은 종속적 삶을 산다. 자신에게 또 물어보라.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나는 단거리 경주를 하는데에 익숙해서 그때그때 내게 시합을 만들어 달리게 한다. 달리고 달성하고 다시 달리게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시합들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된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독립적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다양한 조언들이 등장한다.


고독을 받아들여라

이렇듯 탁월함이나 소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인간은 자신을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격리시켜 고독하게 놓아둔다. 그러면 그는 어느 순간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단계를 맞이한다. 그때 기존의 해석 방식을 수용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만들려는 용기를 발휘한다면 합리성 여부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사실상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과하게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비합리적일 수는 없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 맞는 길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자기가 선택한 길을 스스로 맞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견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고독해야 한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삶의 방식을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가야 하고 필연적으로 고독해진다. 또한 그 길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기에 옳고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그럴 땐 그저 믿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태연자약하라

경쟁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번 새로운 경쟁상대를 만들고 이기기 위해 경쟁한다. 나도 그런 편이고 경쟁상대가 실제 눈에 보이기 때문에 더욱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나 진정 이겨야 할 가장 어려운 상대는 나 자신이다. 경쟁을 계속하는 한 경쟁 상대와 공유하는 기존의 구조에 갇힐 수밖에 없다. 새 판을 짤 수 없고 기존의 한계에 갇혀 버린다. 비슷한 환경에서 그저 조금 낫게 성장할 뿐이다. 비즈니스에서 레드오션에서 치열하게 싸울 필요 없이 블루오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맥락과 같다.

절대적 높이를 가진 자는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자기 업으로 삼지 않는다. 자기를 이기려 하지 타인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경쟁 구도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가지 않는다. 경쟁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그 구도 자체를 지배하거나 장악한다. 자기 게임을 할 뿐이다. 태연자약한 태도다. 그래서 자기가 애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멸함으로써 승리자의 지위를 오래 유지한다. 나무 닭이 그랬다. 그래서 노자도 “자신을 이겨야 진짜 강자다[自勝者强]”라고 한 것이다.

가장 어려운 상대를 찾는다면, 그건 나 자신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이기고, 내일의 내가 이기기 힘든 모습으로 성장해야 한다. 내일은 더 태연자약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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