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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Mar 08. 2020

걷는 사람, 하정우

삶은 그저 두 발로 묵묵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자신만의 삶을 경작해나가며, 시련을 극복해본 적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하정우는 배우이자 감독,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리고 걷는 사람이다. 그는 배우이기에 오히려 자유가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프리랜서들은 언제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직장인처럼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매일같이 치르는 의식은 하루에 3만 보를 걷는 것이다. 일어나서 러닝머신에서 50여 분을 걷고 10분 휴식. 이렇게 1교시를 치른다. 출근할 때도 '돌려 깎기'라고 걸음 수를 늘리기 위해 우회하여 목적지로 향한다. 대화를 하거나 TV를 볼 때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과할까 싶은 이 의식을 통해 몸을 건강하게 준비시킬 뿐 아니라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우울한 날, 왠지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날 그대로 있으면 꼬박 며칠 간을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불 밖에서 한 두 걸음 걸어보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그리고 문을 나서면 걸었던 수많은 나날처럼 다시금 걷게 된다고 말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의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어른이 되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지내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그저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는 걸 느꼈다. 세상엔 정말 수많은 변수와 상황이 있어서 노력한다고 한들 항상 그에 걸맞은 보상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그저 그러한 변수들을 배제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력' 뿐인 것 같다.

예전에는 노력한 만큼에 대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많이 낙담했다. 원인을 분석해보고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에 좌절했다. 낙담에 굳은살이 생긴 덕인지, 이제는 순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생을 길게 보자'라는 배움을 얻은 탓인지 그저 노력하자는 다짐만 남았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어제보다는 더 많이 나아갔을 테니까.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다.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동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하다.

하정우는 영화 <롤러코스트>로 감독으로서 데뷔를 하고, <허삼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감독이자 주연배우를 해냈다. 그러나 <허삼관>은 흥행하지 못했고, 그게 그를 꽤 오랫동안 가슴 아프게 했다. 주변 사람들은 배우만 하지, 감독을 하려고 하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그는 꽃피웠지만, 감독으로서는 아직 새내기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우직하게 계속 걸어 나간다고 말한다.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다"라는 문장이 박정민 배우의 에세이인 <쓸 만한 인간>을 떠오르게 했다. 그가 쓴 여러 에피소드들의 대부분의 마지막 문장은 '어쨌든 잘될 거다. 여러분도 행복하시라'이다. 

힘든 시기를 견뎌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겐 묘하게 낙관적인 면이 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게 '어쨌든 잘될 거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당장은 조바심이 나도, 아직 내 안의 무언가가 꽃피우지 않은 것 같아도 '어차피 잘 될 거다'라고 나도 모든 사람들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 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국가대표>로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다음 해,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올랐는데 "이번에도 상을 또 수상하면 어떤 공약을 펼칠 거냐"는 질문에 기대조차 안 했기에 "트로피를 들고 국토대장정을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건 실화가 되었고 577km 국토대장정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577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매 순간 즐거웠고, 재밌는 기획을 실행하며 프로젝트를 해냈다. 그러나 정작 마지막 날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완주를 기념하는 파티에서도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떴다. '마지막인데 뿌듯하고 보다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에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그저 사람들과 같이 걸었던 순간들이 즐거웠다고 말한다. 마지막보다는 그 과정에서 더 즐기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정도였다. 

어쩌면 우리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로 인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 과정을 온전히 즐기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던 계속 걸어 나갈 거고 그럼 도착할 테니 조금은 이 순간들을 즐겨도 괜찮지 않을까.




배우 박정민의 <쓸 만한 인간>은 위트와 웃픔이 가득했다면, 배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에는 투박하지만 진솔함이 담겨있다. 걷기에 대해 말하는 그에게서 진심어린 열정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글쓴이의 성격에 따라 문체가 퍽 달라지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아서 재밌기도 했다.


누구도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이 유달리 마음에 남았다. 조바심이 많은 성격 탓인지, 얼마 전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 발을 다친 탓인지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되새겼다. 이번 책을 읽고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끝내 어쨌거나 잘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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