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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Jan 19. 2020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고백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반성합니다

내가 선량한 척했던 것들이 사실 상처를 주고 있었다.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홍석천을 좋아하고, 동성애이던 양성애이던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당신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물어봤을 때 책에서 질타받았던 문재인 대통령의 답처럼 “좋아하진 않지만 반대하진 않아요”라고 답했던 것 같다. 이 말은 이성애자인 다수에 편에서는 부드럽게 의견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소수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날카롭고 아픈 말이다.

조그마한 모서리가 있는 다수의 말에도 차별당하고 있는 소수자는 쉽게 다치고 만다.

“동성애를 존중하고 반드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라고 고쳐서 말해 본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특권이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는 특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특권에 대한 내용을 읽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누군가에겐 특권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특히 ‘화장실’ 이야기였다. 내게는 남자/여자/남자 장애인/여자 장애인 4가지 종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 매 순간 불편을 불러일으켰다. 트랜스젠더는 이 4가지 중 어느 화장실로 가야 할까. 외국에서는 이들을 위해 세면대와 변기가 한 칸으로 구성된 화장실을 만드는 등 조금씩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나에겐 너무도 당연했던 공간이 누군가에는 매 순간 불편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능력주의의 허상

인간 자체에 대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능력주의적 관점에서는 의문이 있었다. 노력과 능력으로 성취한 어떤 계급이라면 특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책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는 많은 기준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편향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내가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내게 존재하는 특권으로 인해 보다 쉽게 얻어진 것일 수 있다. 정신 차리고 겸손해야 한다.


형식적 평등보다 실질적인 평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실질적인 평등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즉, 블라인드 채용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평가한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게 얻어진 능력은 개인의 각기 다른 환경에 의해 이미 평등하지 않았다.

시작점이 다르고, 어려운 조건으로 레이스를 뛰는 이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려면 실질적인 평등을 구현해야 한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참 내가 차별주의자였구나 싶었다. 항상 나보다 더 비옥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보며, 내가 노력으로만 무언가 성취했다고 자만했다. 경주마처럼 좁은 시야만 가졌고, 너무 어리석었다. 아무리 앞으로 달려 나가고 싶더라도 온 세상을 트인 눈과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왜 차별하면 안 되는 걸까?

그저 선량하기 위해서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어쩌면 조금 더 설득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선량하기 위해 차별하지 말라 라고 하는 건 부족한 것 같다. 사실 이전의 내가 그저 선량하라는 말에는 설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결론을 내린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특히나 다른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을 인정해야만 사회는 안전한 곳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특정한 상황에서 불안한 소수가 될 수 있다. 여성 직장인이고 미혼인 나라는 사람은 회사의 어떤 집단에서는 다수가 되고, 어떤 집단에서는 불안한 소수가 된다.

사람은 불안한 소수가 되었을 때 다수에게 차별받지 않고, 이질감 없이 어우러질 수 있어야만 사회적 안정을 느낀다. 이러한 안전감이 사람을 편안하게 그 자체로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가 되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시련, 그렇게 성취하고 나서 또 다른 차별을 낳게 된다. (능력주의가 오히려 차별을 굳히게 될 수 있다)

사람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저 존재만으로 존중받고 함께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차별주의자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사회를 살아가며, 여러 집단에 속하며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차별은 마치 삼겹살집 고기 냄새처럼 내 몸에 눅눅하게 배어 들어 있다.

고깃집을 벗어나 스스로 냄새를 맡아보고 환기해야 하는 것처럼 이제는 다수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탈취제를 뿌리는 것처럼 정신 차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이런 책들도 읽고, 많은 사람들과 토론하며 내 몸에 좋은 향기가 가득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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