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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Jan 12. 2020

시를 읽는다. 가슴이 매여서.

누구나 시 하나쯤, 어쩌면 고통 하나쯤 품고 산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원인 모를 슬픔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위로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감당해야 할 인생의 슬픔에 문득 목구멍이 뜨끈해서, 가슴이 먹먹한데 혼자라는 게 극명할 때마다 시를 읽었다.

마음은 무겁지만 즐거운 척 기분의 가면을 써야 할 약속 가기 전, 시간이 남아 들른 서점에서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를 만났다. 그때부터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시를 읽었다.


시를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시인들의 고통에 위로받았다. "내가 더 나아"라고 비교대상을 절하해 나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우위에 둬 받는 위로가 아니다. 적어도 나 혼자 고통스럽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나 고통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구나.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작가는 그가 인생에서 만난 시들을 책에 엮어놓았다. 시가 어떻게 위로가 되었는지, 어떤 시들이 그의 인생을 지탱해주었는지 말이다.

내게는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가 '누구나 고통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로 와 닿았다.

나만 힘든 것 같고 내 인생만 유달리 버겁게 느껴졌을 때 "우리 모두는 고통을 느껴.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단다. 들어봐."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특히 내게 위로가 되었던 시들을 엮어봤다.



인생은 아름다워
                                                    - 쥘 르나르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눈이 보인다
귀가 들린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을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듯한 고통을 몇 번 만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도 나는 살아있어. 더 이상 감사할 일이 없을 때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감사일기에 쓸 감사가 내가 건강하다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 와 닿았다.

살아있다. 감사합니다. 인생은 아름답다.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 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달이나 걸린다

우리 ASAP(가능한 빨리)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최대한 빨리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고.

나는 매 순간을 채찍질하며 사는 편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고.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가 뭘 그리 서둘러서 해야 되냐는 말로 느껴졌다.

달도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리고, 달이 윙크하는 것도 보게 밤하늘도 좀 보고 살고.

밤하늘에 달이 뜨는 걸 보게 쉬엄쉬엄 퍽 여행도 떠나보고.

어차피 돌부처도 모래 무덤이 되는 데 뭐 그리 급하게 살려고 하냐.

나에겐 이렇게 다가왔다.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고. 친구.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뒷부분에서 가슴이 먹먹했다. 가슴이 먹먹하기에 멈추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 많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들.

신기하게도 힘차게 나아갈 때마다 기막히게도 멈춰야 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지금은 이런 인생이구나 라고 받아들였지만 더 멀리 더 빨리 가고 싶은데 자꾸 멈춰야 해서 속상했다.


시를 읽고 돌아보니 나를 속상하게 했던 순간들이 나를 다시금 걷게 했다.

더 무거우니까 더 힘을 냈고, 가야 할 길이 머니까 멈추지 않고 걷는다.

시인을 비롯해 먹먹한 것을 지닌 사람들이 나만은 아닌 것 같아서 덜 외로워졌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 나를 걷게 한다.




누구나 가슴속에 말 못 할 사연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혼자 간직해야 할 고독을 지니고 있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가운데가 정말 아파서 엑스레이에 나올 것 같은 그런 깊은 고독 말이다.

그럴 때 시를 읽는 게 도움이 되더라.

가슴이 쿡쿡 아프고 목구멍이 뜨끈해질 때 시를 읽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하고, 시는 그걸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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