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원 Nov 15. 2023

비바람에 쓸려가는 단풍잎처럼

일상 10

날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자유로이 지냈더니 벌써 11월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어.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의 비보다 황량하고 서늘하며 건조한 가을의 비는 그닥 달갑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들여다보지 않으려던 일기를 한 번 들여다보고, 이제 더는 무참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내고 저 비만큼 건조하게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그저 심연만 파내기 바쁘던 나의 감정도 회복이라는 것을 하는구나. 케이스 스터디를 위해 노트테이킹을 하다 펜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날씨라면 따뜻한 차를 마시며 고요한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 차, 위층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에 천장이 쿵쿵 울려 예민한 귀가 꿈틀거린다. 좀처럼 쉽지 않은 이웃들이다. 


바쁘게 지내지 않았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는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게을렀어. 남들은 내가 바쁘게 산다고 하지만 난 별로 바쁘게 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속이거든. 끊임없이, 내가 바쁘지 않은 순간조차 내가 바쁘게 살아간다고. 끈질기게 그런 나를 유지하다보니 이제 그들의 머릿속에 여유로운 나는 없는 모양이다. 나를 조금 불러 놀고 싶을 때에도 눈치를 본다는거야. 나도 참 주변사람 못 챙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새는 웬일로 반성이라는 걸 하고 있다. 왜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 됐는지, 뭐만 조금 수틀려도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니 사회성 없는 모습만 비죽비죽 튀어나오지.  


그래서 오늘은 또 하늘이 맑다. 단풍과 은행이 물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비바람에 모두 쓸려가버렸어. 낙엽은 낙엽처럼 불리지도 못하고 쓰레기더미에 처박혔다. 계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요새는 땅에 너무 짧게 머물다 사라지니 감성이 푹 죽는다. 글을 읽으며 조금 채워보려고 해도 영... 눈에 차지 않는 활자들은 왜 그런걸까. 활자라는 건 뭘 주워읽어도 양식이 되었던 때가 내 삶의 절반이었는데, 요새는 그런 것도 못한다. 아빠가 웬일로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릴케의 글을 읽었다고 하기에, 뭘 읽으셨냐 물어보니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아, 그 책은 안 읽은지 한참 되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데 한 번 더듬어보기라도 해야겠다 하니 단박에 너라면 한 시간 채 들이지도 않고 다 읽을거라 말하는데 아니라고 말을 못 했다. 아마 이틀은 걸릴거야. 요새는 기억도 집중도 어쩐지 깃털처럼 펄럭펄럭 날아서 어디로 사라졌다 꿈뻑 잊어버릴 쯤에 돌아와. 꼭 물들었다가 금방 비바람에 쓸려가버리는 단풍잎들처럼. 그러니 남아있는 기운이 없어. 간당간당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이파리들처럼 한 번만 더 바람이 불면 다 넘어질 것처럼 불안해. 


아침나절 출근을 하는 아빠를 따라 걷다보면 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나이는 지났나봐. 나도 모르게 자꾸만 무슨 말을 토하게 된다. 어깃장을 놓듯이 내게 아무 말도 걸지 말라는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버리곤 하는 버릇도 들어버렸고, 어쩐지 맘에 여유가 없는 것이 느껴져. 이놈의 여유는 생겼다 말았다 지멋대로다. 그러니 내가 내 장단 맞추는 것도 어려워 이렇게 울증을 겪는가봐. 


오늘은 잠들기 전에 책을 좀 읽어야겠다. 머리와 마음에 양식을 줘야지. 가끔은 그런 브레이크 타임이 필요할 때도 있는건데, 내가 너무 나한테 박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사랑하는 가을이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