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쓴다
나는 왜 글을 쓸까. 새해 첫날 새벽에 좋은 계획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왜 이 명제가 떠오를까. 모든 일에 꼭 당위성이 있어야 하나. 그렇게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나. 솔직히 그건 숨 막힌다. 왜 밥을 먹을까. 살려고. 맛있으니까. 그냥.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실 먹는 문제는 본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따지고 말고 할 필요 없다. 왜 쓰는지에 대한 명제가 새해 벽두에 떠오른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올해 나는 죽기 살기로 쓸 것이다. 한풀이하듯 쓸 것이다. 되나따나 무조건 쓸 것이다. 눈치 안 보고 막 쓸 것이다. 누구 말처럼 뼛속까지 내려가서 쓸 것이다. 오늘 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쓸 것이다. 밥 먹듯 쓸 것이다. 독자들에게 인기 얻고 못 얻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쓸 것이다. 민낯이 다 드러나도록 쓸 것이다. 쓰고 또 쓰고 계속 쓸 것이다. 이렇게 당치도 않은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리해 본다면, 첫째 나는 쓰고 싶은 게 많아서 쓴다. 호모 나랜스, 이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원천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동물이 살았던 곳에는 이야기가 기록된 흔적이 없어도, 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그림으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은 게 사람의 욕구이다. 나도 할 이야기가 많다. 써서 기록하고 싶은 게 많다. 그래서 쓴다.
어떤 이는 쓸 게 없어서 못 쓴다고 한다. 엄살이다. 아니면 아주 대작을 쓰려고 고민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대작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거기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다. 늘 구상만 하다가 졸업할 때까지 한 작품도 못 쓴, 내가 가르쳤던 학생 윤 군도 있었잖은가. 일단 쓸 것이 없다는 사람은 관찰하지 않아서 그렇다. 면밀하게 사물을 관찰하거나 자기와 주변을 들여다보면, 천지사방에 널린 것이 글감이다. 그러니 쓸거리가 없다는 것은 엄살이다.
쓸거리 즉 글감은 세밀한 관찰과 새로운 관점에서 나온다. 글감이 없다는 사람은 그것을 하기 싫어한다.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 바라는 것처럼,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요행수를 바란다. 로또 맞거나 벼락 맞을 확률만큼 드문 요행을 바란다면 어리석지 않은가. 무엇이 되었든 주변에 있는 사물 하나를 면밀하게 관찰하면 쓸거리가 떠오를 텐데, 그것을 하지 않고 글감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쓰고 싶은 게 많다. 그것을 다 쓰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고, 재충전을 위해 잠을 자야 하고, 인간관계를 위해 사람을 만나야 하고, 건강을 위해 산책이나 운동도 해야 하고, 그 외에도 할 일이 쌓여 있다. 그것들을 다 하면서 글을 쓰려면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새벽에 일어나 쓰고 잠들기 전에 쓰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적어도 하루에 한 편이라도 쓰려고 노력한다.
둘째로, 쓰지 않고 배길 수 없어서 쓴다. 나는 본질적으로 호모 나랜스 기질이 특별히 많은 사람 같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일반적인 언어로 하는 객쩍은 수다가 아닌, 구체화되고 조직화된 조금은 문학적 언어로 말하고 싶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혹시 나를 수다쟁이라고 오해는 마시라. 그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느낀 이야기, 경험한 이야기 등을 서사와 묘사와 설명과 논증을 통해 들려주고 싶다. 일일이 찾아가 들려줄 수 없으니 글로 써서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또 개별적으로 만나서 말하면 듣기 싫을 수도 있을 테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글로 써서 내놓는 것이다. 취사선택은 불특정 다수가 할 것이므로. 나는 별로 책임이 없다. 읽기 싫으면 안 읽을 거고, 관심이 가면 읽을 테니까. 또 작가는 하고 싶은 것을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싶어 배길 수 없기에, 나는 글을 쓴다.
셋째, 나는 쓰는 것 자체가 좋다. 많은 사람들이 창작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한다. 아주 적절한 말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이므로. 남성들은 해산을 안 하니까 조금은 그 의미가 피상적으로 다가올까. 하지만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 고통이니까. 출산의 고통을 겪은 여성들은 그 의미가 더 확연하게 다가올 것 같긴 하다. 솔직히 나는 창작의 어려움을 해산의 고통으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대작을 쓰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글 쓰는 게 좋다. 재밌는 놀이보다 맛있는 음식보다 그 어떤 것보다 좋다. 그냥 좋다. 컴퓨터를 열고 자판에 손을 얹는 순간 행복해진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그 행위 자체가 좋다. 글이 되든지 안 되든지 무엇인가 쓰는 게 좋다. 어릴 적에 문자 중독이다시피 읽는 것을 좋아했던 것처럼, 그래서 닥치지 않고 읽었던 것처럼, 잘 쓰든 못 쓰든 이렇게 쓰는 행위가 좋다.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시구 왜 사냐건 웃지요, 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나는 글쓰기를 즐긴다. 즐기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대작을 쓰지 못하는 것일지도. 나는 못 쓰는 게 아니라, 남들이 다 써서 더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쓴다고 헛소리한다. 더 써봐야 사족인데, 인플레인데, 애써 힘 뺄 필요 없다고. 그래서 되나따나 이렇게 쓰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글 쓰는 것을 고통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그럴 거면 쓰지 말라고. 세상에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고통을 사서 느끼느냐고. 나는 즐기기 때문에 전혀 고통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아, 멋지지 않은가. 이렇게 멋진 척도 하면서 글쓰기를 즐긴다.
이제 명징해졌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일이다. 글을 쓰면 생각하는 것이, 아는 것이, 말하고 싶은 것이 명징해진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게 무엇인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 때 많지 않은가. 그럴 때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명징해진다. 쓰고 싶은 것을, 안 쓰고 배길 수 없어, 좋아하고 즐기면서 나는 쓴다. 어슴푸레한 새벽기운이 사라지고 밝아오는 아침처럼, 새해의 내 계획도 명징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