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아래와 친구 먹지 않는 이유

일상

by 최명숙


요즘 새롭게 생긴 모임이 있다. 거기서 한 회원이 나이를 묻더니 친구 하자며 댓바람에 반말 비슷하게 말을 놓았다. 상대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나는 친구보다 모임의 회원으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뜨악한 표정으로 한 살 차인데 뭘 그러냐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일정한 거리 있는 관계가 더 오래간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속내는 ‘너나들이’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면에 중학교 입학시험 여부가 있었다. 그게 뭐라고,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나이에도 그러는지 우스운 일이다. 이만큼 살고 보니 1년은 점 하나에 불과한데.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 마지막 세대다. 서울과 부산에서는 우리 때부터 무시험이었지만, 지방에서는 우리까지 시험을 보았다.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봤는가 안 봤는가 하는 것으로 문화적 차이를 논하랴 싶지만 나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에 쉽게 편승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시험으로 인해 겪은 심적 부담을 무시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일반화할 필요가 없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질 일도 아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친구들은 다음 해 무시험으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 친구들은 자연히 한 살 아랫사람들과 동기생이 되었다. 그런 관계에 내가 있게 되면 애매했다. 내 친구는 나에게 ‘너나들이’를 했지만 한 살 아랫사람과 나는 절대 ‘너나들이’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애매함에서 벗어나려면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후배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나는 한 살 아랫사람들과 절대 친구 먹지 않는다. ‘먹는다’는 표현이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이만큼 그 느낌을 적확하게 표현할 단어가 없다. 그깟 한 살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하지만 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못 박는다. 시험을 보고 중학교에 갔느냐 무시험으로 갔느냐 하는 것에 민감하다. 그 때문에 한 살 차이지만 터놓고 너니 나니 하며 허물없게 지내는 ‘너나들이’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 나이쯤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객지 벗은 십 년 벗이라는 말도 있고, 지금은 나이 성별 상관없이 친구가 되는 세상이며, 나도 그걸 이제 당연하게 여기는데. 그래도 한 살 아랫사람과 친구 먹는 건 꺼려진다. 껄끄럽고 싫다. 내 친구들 중에 한 살 아래와 친구로 지내는 경우 많다. 그건 그 친구의 경우이고, 나는 여전히 싫다. 이 무슨 고집인가 말이다.


물론 나도 한 살 위의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지 않는다. 같이 공부한 동기생 아니고는. 따지고 보면 한 살 차이가 가장 조심스럽다.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도, 깍듯이 대하며 거리를 두는 것도, 상대방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어렵다. 친구 하자고 해도 선뜻 너나들이를 하긴 힘들다. 여기서 나의 까다로운 성격이 드러난다. 인정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예민하고 까다로운 게 많은 나라는 것을.


내 나이 스무 살 언저리쯤에 떠돌던 이야기가 있다. 갑자기 58년생부터 무시험으로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 위력자의 자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편이었다. 아무리 위력자라 하더라도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교육제도를 바꿀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치면서도 ‘ㅇㅇ이를 위하여’라고 외쳤다. 그건 비웃음이었고, 자조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편한 제도에 편승하지 못한 아쉬운 속내를 표출해 냈던 것일까. 살다 보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사회적으로 아무런 영향력 없는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건, 한 살 차이를 ‘너나들이 친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아주 소심한 실천뿐이라니, 우습지 아니한가. 안다. 나도 잘 안다. 겨우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느냐 여부를 놓고, 너나들이가 되네, 안 되네 한다는 것이, 유치하다는 것도. 그건 어쩌면 의도치 않은 피해의식 같은 것이지도 모르겠다. 세상만사 운이라고 치부하면 편할 텐데.


사람의 생각이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는 쉽게 넘어갈 일도 안 되는 경우가 있고, 큰 일에는 대범하면서 작은 일에 예민한 경우도 있으며,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일도 중대한 일로 인식될 때도 있다. 내가 한 살 아랫사람들과 친구 먹기가 안 되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이유를 대더라도, 실은 나도 이해 안 간다. 그래도 안 하고 싶은 건 하지 않아야지 어쩌겠는가. 얼마 전부터 법이나 양심에 걸리지 않는 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기로 한 것도, 나의 이해 안 되는 의식과 행동을 내가 이해해 주기 위해서다. 지독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아닌 한, 나를 내가 감싸주고 싶어졌다.


그 무릎까지 쌓인 눈 속을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입학시험을 보러 가던 날이, 내 삶의 여정에서 힘듦을 견디게 한 경험이었음에도, 6학년 여름방학을 반납하고 시험공부에 매달렸던 시간 또한 내게 끈기를 길러주었음에도, 속된 말로 뺑뺑이 바로 아래 세대와 친구 먹을 수 없다. 겨우 한 살 차이임에도. 이 얼마나 쪼잔하고 옹색한 마음인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게 바로 아집 아닐까. 못난 아집.


이렇게 고집스럽고 이상한 나이기 때문에, 누구든 어떤 행동이든 또 생각이든 웬만하면 이해하는 편이다.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고, 본인이 그렇다는 데, 이해를 하네, 못 하네 할 것 없다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다. 지금 그깟 한 살 차이가 뭐라고 그리 유세를 부리느냐 타박할 사람도 있으리라. 다 이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니까.


아, 오해 마시라. 내가 한 살 아랫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거부하는 건 절대 아니다. ‘너나들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너니 나니 하면서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 안 된다는 거다. 모임의 그 회원도 친구처럼 가까이 지낼 수 있지만 그건 싫다. 그래서 친구 하자는 걸 거절했을 뿐이다.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댓바람에 반말 섞어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친구의 의미가 '너나들이'였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다. 서로 예의를 지킨다면 거절했을 리 없다. 58년생 누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나를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치부할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못난 나를 인정하는 것밖에 안되는 글을 쓰다니, 못나도 참 못났다.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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