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 한쪽에 피었다. 카랑코에, 그 작은 꽃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방실거리는 아기 같다. 어쩌면, 어쩌면! 네가 피었구나. 추운 겨울, 어쩌다 물이나 한 번 주고 내박쳐두다시피 했는데. 제대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애면글면 안타깝게 지켜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꽃을 피워냈구나! 카랑코에 앞에서 호들갑을 떨며 혼잣말을 해댔다. 대견하기 그지없다. 할 일을 스스로 훌륭하게 해낸 작은 꽃, 카랑코에!
발코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문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을 함께 맞으며 자신을 단련했을 터다. 방안보다 훨씬 추운 곳이 발코니인데, 그 추위를 견디고 꽃을 피워냈다는 사실이 감동이었다. 사실, 꽃은 추위를 견디고 나야 꽃을 피우는 게 보통이다. 거실 창가에도 카랑코에가 있건만 꽃은커녕 꽃대조차 올라오지 않는다. 찬바람 속에 일정 기간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는 품종인 것 같다.
작년에도 발코니에 있는 카랑코에는 봄에 꽃을 피웠다. 거실 창가에 놓은 것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꽃은 피지 않았다. 그걸 잊었다. 발코니에 내놓았어야 했는데. 화초 기르는 것이 취미인 내가 식물의 성격을 모르고 있다니. 카랑코에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양육자다. 그러면서 화초 기르는 게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평생 교육자로 살다시피 했는데, 그 또한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학생 각자의 재능과 천성을 알아 교육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리 못한 것 같다.
내 자식조차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분야를 전공하게 했다는 것만 함함해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천성을 알고 그 품성에 따라 가르치지 못했다. 특히 유난히 느리고 느긋한 아들을 얼마나 닦달했던지. 생각이 많아 실천이 느린 것일 수 있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온화한 딸을 치열하지 못하다고 얼마나 야단쳤던가. 재능을 키워주고 북돋아주는 게 아니고, 내 마음에 맞도록 만들려고 했다. 마치 분재처럼.
당나라 때 문인 유종원이 쓴 ‘종수곽탁타전’을 떠올렸다. 나무의 천성을 살펴 그대로 순응해 살도록 했다는 정원사, 곽탁타. 그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내 자식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대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불쑥불쑥 숨어든 욕심 때문에 자식들을 다그쳤고, 학생들 또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 같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이 없겠지만 카랑코에 앞에서 감탄과 함께 회한이 몰려왔다.
교육은 무엇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이제야 알다니, 그 천성을 살펴 돌봐주는 정도만 했어야 하는데, 간섭과 다그침으로 일관하다니. 나는 모든 것에 늦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깊은 후회가 몰려온다. 누구와 비교하지 말고, 한 존재 그대로 인정하고, 관심을 갖되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알기는 잘 알면서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교육자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참된 교육자가 아니었다는 데 이르자, 지금까지 내 삶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괴로웠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내게 배우고 있는 사람들은 성인들이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건, 먼저 이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선배 문인으로서, 그들이 재능을 펼쳐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일까. 어려운 일이다. 내 자식들도 이미 성인이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손자 온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 그것도 안 될 일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카랑코에꽃을 보았을 때, 감탄과 함께 밀려들던 감동이, 차츰 회한으로 바뀌고 있었다. 카랑코에꽃이 주는 깨우침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평생 배워야 한다더니, 식물에게도 배울 게 많다. 그나마 다행이다. 배우려는 자세를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자세를 견지한다면 칠십이 되었을 때, ‘종심소욕 불유구’는 되지 못해도, 큰 허물은 없지 않을까. 아니 감해지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어도 좋으리라.
다시 카랑코에꽃을 들여다본다. 저 작고 예쁜 꽃이 주는 깨우침은 그뿐이 아니었다. 추위를 견디고 문틈으로 새어드는 찬바람을 맞으며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운 것에서, 고난을 견딘 자의 멋진 결과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영광은 누구나 얻는 게 아니다.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리라. 거실의 카랑코에 같은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그것 또한 작고 예쁜 꽃이 주는 깨우침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창작뿐이다. 추운 겨울 찬바람을 견딘 카랑코에처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현실의 즐거움과 편리함을 떠나, 지난할 수 있는 창작을, 그 끝이 어딘지 모를 그것을, 부단히 할 수 있을까. 가능할 것도 같다. 아니, 가능하다. 오늘부터 더 성실히, 부지런히, 내 생애의 꽃을 피우기 위해 경주하리라. 그것이 대단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그만큼만 하면 된다. 내 생애의 꽃, 그건 내가 키워낼 수 있는 만큼의 꽃이다. 카랑코에꽃 앞에서 생각이 더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