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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아닌 필연의 시간

일상 속에서 배우기

by 최명숙


두 친구의 이야기는 자못 심각한 듯했다. 주거니 받거니 호응하며 맞장구를 쳤다. 비말이 튀어 앞에 놓인 음식에 들어갈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음식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음식 앞에 놓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습관이다. 두 친구의 밥공기는 반도 비워지지 않았다.


가운데 놓인 코다리찜 살점을 슬쩍 들어다 내 ‘앞접시’에 놓았다.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적당하게 양념과 함께 버무려져 익은 시래기도. 마른 김까지 몇 장 밥주발 뚜껑에 놓았다. 그것만 가지면 남은 밥을 먹는 데 충분할 것 같았다. 이제 그들이 떠들든 말든 관심 없는 이야기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코다리찜 맛을 음미하면 되리라.


“왜 말이 없어?” 옆에 앉는 ‘정’이 내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유난히 젊고 예뻐 보인다. 수박색 티셔츠를 받쳐 입고 카키색 재킷을 걸쳐 그럴까. 열흘 전에 만나 코다리찜을 먹었던 남자동창생이 정이와 셋이 또 만나자고 연락을 했었다. 근처 사는 친구들끼리 밥 먹자고. 그래서 남자동창 ‘기’와 정이 그리고 나, 우리 셋이 예의 그 식당에서 만났던 것이다. 정은 코로나 이전에 만나고 처음이니, 만난 지 사오 년은 족히 된 것 같았다.


“왜 말이 없느냐고.” 정이 재차 묻는다. “응, 다 듣고 있어. 먹느라고 그래.” 사실 둘의 대화가 자못 심각해 보이고 화제가 내 관심 밖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이는 전날도 여기서 이걸 먹었다며, 집개로 큰 살점을 들어 내 앞접시에 놓았다. “많이 먹어.” 생긋 웃는 얼굴도 여전히 예쁘다. “이만해도 되는데 왜.” 남은 코다리찜도 두 젓가락쯤 있었다. 앞에 앉은 기가 어제도 왔으면 다른 곳으로 갈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코다리찜만 먹는다. 지난번에 두 공기를 먹었지만 오늘은 한 공기로 끝내리라. 콩나물도 먹고 샐러드도 먹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으니 포만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긴 아직도 나는 소식(小食) 중이니까. 그걸 지킨 적 드물지만 심정적으론 늘 그랬다. 최면도 걸었다. 소식 중이라고. 탈이 안 난 것을 보면 내 위장은 그런대로 상처가 아물고 튼튼해진 것 같다.


기와 정은 어느새 수저를 놓고 이야기 중이다. 화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것도 내게는 관심 밖의 것이다. 솔직히 지루했다. 만났을 때 그 반가움은 어느새 달아나고. 아, 나는 왜 이 자리에 나왔을까. 나의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걸까. 도대체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군중 속의 고독’을 떠올리며 후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때 기가 말했다. 커피 마시러 가자고. 우리는 일어섰다.


커피를 앞에 놓고도 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음식점에서 했던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둘이 심각한 듯 나누는 이야기는 남편의 퇴직과 그 후의 일상, 그리고 이렇게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관심 둘만한 화제인데 나는 관심이 없다. 그래, 소설의 소재가 될 수도 있으니 집중해서 듣자. 그래도 재미없었다. 들어두면 모두 쓸 데가 있을 거야, 최면을 걸어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슬쩍 끼어들어 몇 마디 거들었지만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 달라 흥미를 끌지 못했다.


디카페인 커피는 맛이 밋밋했다. 연하게 해달라고 주문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래도 그냥 마셨다. 두 친구의 이야기를 그냥 듣고 있는 것처럼. 카페 안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들어올 때 세 테이블밖에 사람이 없었는데, 금세 가득 차있다. 새로 오는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벤자민고무나무가 심긴 저 큰 화분 두 개를 들어내면, 테이블 두 개를 놓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걸 건의할까 말까 고민했다. 쓸데없는 생각이고 고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와 정은 아직도 그 이야기로 옥신각신한다. 기는 이제 막 퇴직한 남편의 입장이고, 정은 평생 살림만 한 진정한 가정주부니까, 둘의 입장 차이는 첨예하게 다르리라. 정은 남자도 퇴직하면 집안일을 같이 하고, 밥도 스스로 차려먹으며, 가끔 솜씨를 부려 아내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기는 이제 퇴직한 지 두 달밖에 안 돼, 좀 쉬고 싶은데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집안일을 어느 정도 함께 하고, 밥도 차려먹을 때 있지만. 정은 더 잘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기는 평생 일만 한 최후가 이것인가 싶어 허탈하다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까. 학위논문을 ‘노년소설 연구’로 썼을 정도로 노년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인데. 소설 창작도 그렇고.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게 이상했다. 듣고 있는 척 미소를 약간 띠고 고개를 가끔 끄덕였으나 둘의 이야기에 내가 왜 관심이 없는지, 그것의 원인을 찾는데 집중했다. 두 친구가 내게 의견을 물으면 ‘글쎄’라고 대답하면서. 친구들에게 민망했지만 관심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한참 후에 답을 찾았다. 그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고 주위에서 늘 들은 이야기, 즉 진부한 이야기라 그렇다. 신선감이 떨어져서. 더구나 모범답안 같은 게 이미 나와 있는 것 아닌가. 퇴직한 남편은 집안일을 함께 하고 서로의 삶을 인정해 주며, 둘이 함께 할 운동이나 취미를 모색해야 한다는 등의 뭐 그런 답안. 왜 그런 답안이 있어야 하는 걸까. 집집마다 상황이 다르고, 두 사람의 성향도 다른데. 모범 답안의 틀을 짜놓고 그것을 제시한다는 건, 진부한 문제만큼 답도 진부하다.


글도 그렇다. 신선해야 한다. 그래야 누가 읽는다. 주제든 소재든. 그것이 안 된다면 표현이 신선해야 한다. 세상에 아무리 소재가 널렸다고 해도 이미 누군가가 쓴 소재들이다. 관점을 바꾸면 달리 보인다지만 그것이 쉬운가. 주제는 뻔한 것이고. 뻔한 것은 진부하다. 그러니 신선한 글을 쓰긴 힘들다. 신선하려면 독창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방법은 표현의 독창성뿐이다.


결국 우리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글쓰기의 유의점을 다시금 알게 된 필연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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