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진정한 시발점
나의 대필 경력은 십오 년 정도 된다. 열 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니까. 그만하면 경력으로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우습다. 열 살, 초등학교 3학년부터 대필을 했다는 게. 모두 편지 대필이었다. 그때가 내겐 대필이 꽃피던 시절이었다. 어째서 그 열 살짜리에게 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했을까.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대필료는 또 얼마나 받았을까.
전화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편지는 소식을 전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그때가 나의 대필 인생이 꽃피던 시절이었다. 교통수단이 원활하지 않고, 통신수단 역시 그랬으므로. 윗마을과 우리 마을까지 합쳐 한두 집만 전화를 놓고 살았다. 그것도 이장님이나 지역의 유력자 정도 돼야. 그러니 편지가 소식 전하고 받는 요긴한 수단이 될 수밖에.
어른들 중에 편지를 원활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여성들 중에는. 한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드물었고 편지 형식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더욱더. 그것이 대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읽고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성이었지만 어머니에게 대필을 부탁하진 않았다. 내게 대필 의뢰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스스로 능청스럽게 써주곤 했다. 다 쓰고 나서 빠진 곳이 없나 읽어주면, 의뢰자들은 아주 만족해했다.
대필을 부탁했던 사람은 이웃집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었다. 시집간 딸에게, 객지에 나간 아들에게, 친정 오라버니에게, 군대 간 아들에게 등등. 의뢰자들이 말하는 대로 받아 적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다 들은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문장을 구사해서 썼다. 다 쓰고 나서 빠진 곳이 없는지 읽어주면 잘 썼다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을 어쩌면 그리 잘 표현했느냐며 흡족해했다. 그게 나를 마을의 대필자로 살게 한 이유였던 것 같다. 그 칭찬, 부추김. 그러면서 상승하는 성취감과 자신감.
이상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있는 집이 있었고, 집집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몇 명씩 있는데, 왜 내게만 대필의뢰가 들어왔을까. 의뢰자의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열 살짜리 나에게 써달라고 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들고, 치마폭에는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를 싸안고, 우리 집 사립문을 넘었다. 그리곤 구구절절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밥상을 공부상으로 썼는데, 거기에 슬며시 올려놓으며.
대필 실력은 그러면서 늘었다. 어릴 적에는 그걸 그대로 썼는데, 차츰차츰 이야기를 정리해 쓰기 시작했으므로. 어느 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울고, 듣는 우리 할머니도 울었다. 나도 울적해져서 가슴이 싸해지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군대 간 이웃집 오빠에게 대필하는 편지에, 추신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써넣었다. 오빠, 저 명숙이예요. 언제 휴가 와요? 오면 또 하모니카 불어줄 거죠? 뭐 그런 시답잖은 것들이지만. 객지 생활하는 건넛집 언니에게도 마찬가지고. 내가 유난히 고향마을 오빠 언니들과 친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 만날 때에도 그때의 에피소드가 빠지지 않고 회자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집안 사정도 대부분 잘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옆집 아주머니 친정집 사정까지. 아는 척하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꽤 된다. 뒷집 할머니가 우리 집 참깨가 한두 말 줄어든 것 같다고 해도 모른 척했다. 며느리인 뒷집 아주머니가 그걸 장에 갖고 가 팔아, 고등학교 간 늦둥이 남동생 교복 맞추는데 보냈다는 얘기 같은 것 말이다. 더한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입 꼭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결혼할 때 옆집 아주머니는 세숫대야를, 뒷집 아주머니는 담요를, 건넛집 할머니는 스텐요강을 사주셨다. 동네 아가씨 누가 시집을 가도 그런 선물을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는 그랬다. 결혼 전전날 일부러 나를 찾아와 잘 살라고 덕담을 건넸다. 그것 역시 내게만. 그렇게 마음을 써주었다, 마을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이제 누가 내 편지를 대신 써줄까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내 뒤를 이은 마을의 대필자는 없었던 듯하다. 그즈음에 집집마다 전화를 놓기 시작했으니까.
마을 어른들이 내게 준 것들이 대필료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 마음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이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세숫대야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용도실에 두고 쓴다. 걸레를 빨거나 빨래를 삶을 때. 요강은 분가할 때도 가지고 와서 아이들 이동변기로 요긴하게 썼다. 지금은 없지만. 담요도 오래 썼다. 겨울이면 연탄 피운 방 아랫목에 깔아 두었다. 전기밥솥을 쓰지 않을 적엔 밥주발을 묻어두기도 했고. 그런 물품들을 쓰면서 고향의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을 떠올리곤 했다.
편지 대필을 하면서 내 글 솜씨가 성장했던 걸까. 꾸준히 쓴 일기가 도움이 되었던 걸까. 모두 다인 것 같다. 내가 작가가 되었을 때, 고향 언니 오빠들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은 내 책이 출간될 때마다 가장 먼저 사서 읽는 애독자들이다. 대필이 꽃피던 그 시절, 그때가 글쓰기의 진정한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