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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과제 완수하기

매일 써야 하는 이유

by 최명숙


30분째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껌뻑이는 커서는 어서 문자를 찍으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두 줄 또는 한두 단락 써놓고 멈춘 파일들을 모두 열어보았다. 그것을 잡고 써볼 생각으로. 하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다시 눈을 감고 생각을 떠올리려다, 책상 주위의 물품들을 뚤레뚤레 쳐다보기도 했다. 그래도 쓰고 싶은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좀처럼 없었다. 미세한 감정 한 가닥을 잡거나 모티브 하나를 가지고 2,500자 내외의 산문을 쓰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글감이 없다고 한탄하던 제자들이 생각났다. 늘 구상 중이라던 윤 군도.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다. 왜 글감이 없느냐고 천지사방에 널린 게 글감이라고 큰소리치던 선생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참으로 엉터리 선생이 아니었던가. 자괴감이 드는 새벽이었다.


눈을 뜨면 보통 새벽 5시 30분에서 6시 사이다.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면서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요즘엔 누가 언제 글을 쓰느냐고 물으면 새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예전엔 시도 때도 없이, 쓰고 싶을 때 쓴다고 했는데. 새벽이라고 하니 무언가 그럴듯해 보인다. 물었던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맑은 정신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단다. 실은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


30분 시간이 흐른 후, 보통 글쓰기 수업 첫 시간에 내가 주문하던 게 생각났다. 10분 동안 무엇이나 쓰도록 하는 일명 ‘10분 쓰기’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못 쓰겠다’ 또는 ‘안 써진다’는 문장만 계속 써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다 떠오르는 게 있으면 문장을 이어가라고. 나도 그것을 해보기로 했다. 생각나는 대로 무엇이든 써보기로. 그래서 시작한 첫 문장이, 30분째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쓴 것이다. 그러고 나니 커서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래, 오늘은 마음 가는 대로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은 70세가 되니 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마음 가는 대로 써도 글이 될 수 있을까. 아직 사람이 덜 되어서 마음 가는 대로 했다간 ‘만무방’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을 테지만, 마음 가는 대로 썼는데 그래도 읽을 만한 글이 된다면, 가히 ‘글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당찮은 일일 수 있는데, 그것을 꿈꾼다.


알람이 울린다. 7시다. 끄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람을 7시로 설정한 것은 잠을 충분히 자기 위해서다. 12시 정도에 잠자리에 드는 게 보통이므로 적어도 예닐곱 시간 잠을 자기 위해서다. 하지만 알람 울리기 전에 꼭 잠에서 깬다. 대여섯 시간 잠을 잔다. 예전엔 네 시간이었는데. 그것에 비하면 아주 양호하다.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이렇게 잠을 푹 자게 되었다. 네 시간 자던 때에 비해 몸 상태가 좋다. 글쓰기가 가져다준 축복이다.


글을 쓸 때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기 때문에 피곤해 그런 것인지, 내면의 나를 만남으로써 스트레스가 사라져 그런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쨌든 수면의 질이 좋아졌고 생활이 더 활력 있어졌다. 글 한 편을 쓰고 나서 느끼는 성취감 덕분일까. 순순하게 글이 풀리지 않는데도 써내면 그게 더 함함하다. 자아도취에 빠질 때도 간혹 있다. 그것도 글 쓰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그냥 누린다. 삭제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 대다수지만.


매일 한 편의 글을 쓰기 시작한 지 8개월째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다. 처음에는 쓰고 싶을 때 쓸 생각이었다. 하루에 한 편씩 쓰면서 한동안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마침 제자들과 백일 백 편 쓰기를 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그것을 마치고 제자들은 쉬고 있지만 나는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이라면 뭔가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글쓰기를 지속하는 게 순전히 제자들 덕분이라고 해둘까. 아무튼 언제까지 될지 모르나 당분간 계속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200편 넘는 글을 썼으니 성과가 크다.


글의 편수가 많다고 꼭 좋은 것이냐고 자문하지 않으련다. 당분간 계속 써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분 동안 컴퓨터 화면만 바라본 것이다. 그러다 커서의 재촉을 느끼고 그 상황을 시작으로 이렇게 문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완성도 있는 글은 퇴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쓰는 게 먼저다.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왜 이렇게 쓰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일까. 먼저, 올해 목표가 열심히 쓰는 것이고, 다음은 그것으로 인해 얻는 게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글쓰기의 효과는 나타나고 있다. 퇴직 증후군을 느끼지 못한 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퇴직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 때문에 오는 것들. 글을 쓰면서 그런 게 거의 없다. 물론 달라진 생활 모습으로 한 차례 위경련이 일어나긴 했으나 잠깐이었다. 매일 한 편의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할 겨를이 없다. 미래가 불안하지도 않다. 두통이나 소화불량도 없다. 그뿐인가. 수면 시간이 늘었고 수면의 질도 좋아졌다. 그래서 더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만하면, 오늘 30분 동안 멍하니 앉아 글감을 찾지 못하다, 그대로 첫 문장을 쓰고 이렇게 되든지 말든지 글 한 편을 짓는 행위에 대한 당위성이 있지 않은가. 이게 또한 글쓰기의 매력이기도 하고. 벌써 2,600자가 훨씬 넘었다. 이제 이만큼에서 마무리 지으련다. 오늘도 이렇게 과제 아닌 과제 같은 나만의 과제를 완수했다. 아무도 내주지 않은 과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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