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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숙과 생질녀

외삼촌

by 최명숙


부재중 전화가 두 번이나 찍혔다. 외삼촌이다. 그것도 새벽에. 확인한 것은 오후 2시였다. 전화가 조용해서 보니, 이런! 진동으로 되어 있지 뭔가. 일을 할 때 그렇게 해놓고 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고 전화를 책방에 던져 놓았으니. 어머니의 두 살 아래 남동생, 외삼촌. 대부분 그렇겠지만 내게 특별한 분이다. 거의 친구 수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삼촌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통화한다. 잦을 때는 두세 번도 한다. 말동무나 다름없다. 외삼촌이 통화할 때마다 해주는 옛날 외가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외가의 외가에 대한 것도 가끔,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 외사촌들의 소식 등 다양하다. 정치 이야기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의 관심 분야를 스스럼없이, 수다처럼 이야기한다. 여동생은 외삼촌과 뭐 그리 할 얘기가 있느냐고 한다. 안부하고 나면 그만이라며.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이상하게 전화를 할 때마다 길어진다.


내가 외삼촌과 이야기할 게 많은 건 정서가 비슷하기 때문인 듯하다. 외삼촌은 구순이 다 되어가는 연세에도 무척 서정적이다. 달을 보고 느낌을 이야기하고 꽃을 본 감상도 말씀하신다. 나도 물론. 시는 외삼촌이 써야 할 것 같다. 돌아가신 큰외삼촌은 한시를 쓰셨다. 예전에 한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라 시적 감성을 가진 게 당연하다. ‘시경’ 몇 구절을 지금도 외우신다. 내가 작가로 등단했을 때, 무척 기뻐한 외삼촌들이었다. 그러니 나와 이야기할 게 많은 건 당연하다.


외삼촌은 내가 외탁을 했다고 하신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친다. 하긴 외할머니의 유전자를 25%나 닮는다고 하니, 나머지 반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도, 외탁이 맞다. 누구라도. 외적인 것은 친탁을 하고 내적인 것은 외탁을 한 것 같다. 완벽하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략 그렇다. 외가의 학구적인 경향을 닮은 것도 맞다. 외가 쪽에는 박사가 몇 명 되니까.


무엇보다 문학적 감성을 외가로부터 얻었다. 방학 때 외가에 가면 골방에 틀어박혀 외삼촌들과 이모가 보던 문학전집류와 잡지들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그 골방에서였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어두침침한 골방. 어느 땐 하루 종일 그 방에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방학 때 외가에 가는 게 즐거웠다. 그건 외가 어른들의 환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많은 책들 때문이었다. 세로로 내려쓴 것에 한자가 드문드문 섞인 소설이었다. 그래도 그걸 대충 맞춰가며 읽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행복하고 안온했던 시간들이다.


골방도 그렇지만 대청마루는 어떻던가. 마루에 엎드려 방학숙제하거나 책 읽을 때 풍겨오는 나무 향, 안산에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 이모가 쪄주던 옥수수와 감자. 간혹 외삼촌은 책 읽는 내 옆에서 댕댕이 줄기로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왕골돗자리 짜는 고드랫돌 소리가 사랑방에서 들리고. 평온하고 고즈넉한 풍경을 상상하면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은 재현될 수 없는 기억 속에만 있는 풍경.


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의 기초가 되는 ‘명심보감’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외삼촌은 내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하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공부야 다 좋지만 가장 좋은 공부가 경전공부라며. 생각해 보면 그날 이후로 외삼촌과 대화가 잦게 된 듯하다. 공감되는 부분이 하나 더 늘었으니까. 물론 나의 경전공부는 아주 형편없다.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명심보감, 격몽요결, 설문해자, 사략을 한 번 읽었을 뿐이다. 그나마 흔적을 지니고자 격몽요결의 독서장과 논어의 학이편, 시경의 관저장 정도만 암기할 뿐이다.


가끔 통화 중에 그 부분을 암송해 드리면 외삼촌은 아주 흡족해하신다. 당신도 명심보감 몇 구절을 암기하고 있다며. 친척 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외삼촌이나 내가 이름을 짓는다. 부탁이 들어올 때만. 그러면 서로 상의도 한다. 이름 짓은 책을 외삼촌과 내가 똑같은 걸로 산 것도 그래서다. 외숙과 생질녀인 우리는 때로 친구처럼, 사제지간처럼 지낸다. 외삼촌이나 나나 노년기에 이르렀으니 때론 노년문제에 대해 기탄없이 대화도 나누며.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바로 외삼촌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갔다. 외삼촌이 받으셨다. “이른 새벽에 전화하셨던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외삼촌이 훗 웃었다. “아니, 주책없는 늙은이지 뭐냐, 보니 새벽이더라. 갑자기 전시회 한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말이야.” 엽엽하기 그지없는 외삼촌. 스치는 소리로 며칠 전에 말했는데, 그걸 기억하신 모양이었다. “아주 잘되고 있어요. 기억력 짱이에요, 외삼촌!” 외삼촌과 대화할 때 일부러 어리광스럽게 또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무척 좋아하신다.


노인들이 스치는 말을 그렇게 기억하기 쉽지 않다. 금세 한 말도 잊는 게 보통이다. 외삼촌은 그런 부분이 다르다. 엽엽한 것도 그렇지만 기억력이 좋고 상대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잘 아신다. 그게 바로 공감능력이리라. 공감능력이 있기에 생질녀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생질녀와 이렇게 길게 통화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모두 외삼촌의 공감능력 덕분이다. 어느 때는 수다가 길어져 두 시간 동안 통화한 적도 있다. 보통이 30분이니까.


“새벽이고 오밤중이고 상관없어요. 언제나 받을 테니 아무 때나 하세요. 진동이라 몰랐어요.” 새벽에 전화한 것을 민망해하시는 외삼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다. 외삼촌은 잘 알았다며 웃으셨다. 방학 때 외가에 가면 환히 웃으며 반겨주던 청년 외삼촌이 이제 구순 가까운 노인이 되었다. 그 꼬맹이 단발머리 나도. 외숙과 생질녀, 이제 친구나 다름없다. 스무 살 나이 차이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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