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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Sep 29. 2023

슬픔 품은 달빛

추석즈음

  

나에게 달은 그리움이고 슬픔이다. 달이 뜨는 날이면 종종 거실에 앉아 달을 본다. 불을 끄고, 소파가 아닌 방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하얀 달이 이지러졌거나 둥그렇거나 상관없이 내 마음에는 언제나 둥근달로 뜬다. 


문창호지를 가만가만 두드리며 달빛이 방안에 가득 스며드는 날이 있었다. 동생들과 우리를 가운데 뉘고, 가장자리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잠들던 날. 여느 날과 달리 문풍지 우는 소리도, 뒷산의 부엉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던 날. 방안에 가득 찬 달빛은 칠흑같이 까맣던 방을 훤하게 밝혔다. 달빛 때문에 잠이 깼다. 


가만히 방문을 열고 뜰로 나갔다. 달빛이 가득 들어찬 작은 안마당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이했다. 올려다본 밤하늘엔 보름달이 떠있었다. 눈과 달빛이 함께 온 누리에 아낌없이 내리는 광경이라니. 춥지 않았다. 언젠가 만져본 참새 배 깃털처럼 포근했다. 담장 위에, 건조실 지붕 위에, 사다리 위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가, 고뿔 들라. 어여 들어와 자.”

할머니의 정겨운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아쉬운 마음을 마당에 두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달빛도 나를 따라 들어온 듯, 방안은 더 훤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소리 없이 내리던 함박눈 사이를 뚫고 내리던 그 달빛은, 내게 그리움이다. 


추석 다음날 밤이었다. 열여덟 소녀였던 난 마루에 앉아 달을 보았다. 달빛이 유난스레 발그레했다. 그 밤이 지나면 집을 떠나 객지로 나가야 한다. 심란하고 두려웠다.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나를 괴롭혔다. 내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뜬 밝고 둥근달.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밤하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달구지 하나가 집 앞을 지나갔다. 그 위에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우리 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밝은 달빛 때문에 그가 누군지 훤히 보였다. 내게 몇 번 연서 비슷한 것을 보냈던 한 살 위의 그. 몇 번 더 내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달구지와 그가 흔드는 손짓이 달빛 사이로 멀어져 갔다. 마루에서 일어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후 두 달쯤 지난 초겨울 문턱에서, 그의 부음을 들었다.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그의 편지에 답장 한 번 하지 않은 인색한 마음을,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은 야박한 마음을, 몰래 타박했다. 달라졌을까, 내가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친구가 되었다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손 흔들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밝히던 달빛은, 내게 슬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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