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콩달콩
신발장 안 우산꽂이에 비닐우산이 네 개나 꽂혀 있다. 투명한 비닐에 까만 물방울무늬 무늬가 박혀 있는 것 하나, 분홍 하트 무늬가 있는 것 하나, 두 개는 무늬가 없이 맑기만 하다. 그 옆에는 장우산과 접이식 우산 몇 개 그리고 양산까지. 차에도 세 개 있고 아직 쓰지 않은 것도 두 개 있으니 우산 풍년이다. 그중에 자주 눈길이 머무는 우산은 분홍 하트 무늬가 새겨진 투명한 비닐우산이다.
“새미야, 우산 챙겨. 오늘 오후에 비 온대.”
출근하는 딸에게 당부했다.
“아니, 사무실에 두 개나 있어요. 알아서 할게요.”
접이식 파란 우산을 손에 쥐어줘도 끝내 던져놓고 나갔다. 난 그 뒤통수에 대고 눈을 한번 흘기는 게 다였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갖고 가서 줘도 끝내 거부하는 고집쟁이 딸이기 때문에. 그런 날이면 영락없이 빗물 뚝뚝 흐르는 비닐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이구, 거봐! 비 온다고 했잖아. 하여간 황소고집이야!”
퉁바리를 주었다.
“헤헤, 엄마! 사무실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잖아요.”
웃고 마는 딸이었다. 그쯤이면 잔소리하려던 내가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말해도 소용없으니까.
키가 꼭 비닐우산 두 개 이어놓은 정도인 데다 체격도 자그마해서 얼핏 보면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 얼굴도 작고 손발은 더욱 작아 앙증맞게 생긴 딸. 피아노를 전공하려다 작곡으로 바꾼 것도 작은 손 때문이었다. 발 또한 얼마나 작은지 225mm 신발을 신는다. 그런데 마음이 강하고 대범하면서 고집이 세다. 신체와 마음이 조화롭지 않다고 할까.
“새미야, 피아노 레슨 좀 해주라. 아르페지오 주법 배우고 싶어.”
“레슨비 주세요. 그냥, 안 돼!”
“우리 사이에 뭘 그래. 너 내가 가르친 거잖아! 그렇게 교육비를 들였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안 돼요! 부모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유치하게 왜 그러세요? 전공자 대하는 태도가 왜 그래요!”
째려보는 눈이 매섭다.
“치사해서 싫어! 나도 그건 못해!”
결국 아르페지오 주법을 혼자 연습해야만 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되는 날이 오겠죠. 노오력을 해보세요.”
신통치 않게 더듬대며 치는 걸 보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조롱조였다. 얄밉기 그지없지만 방법이 없다. 결국 조금 하다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고민되는 일을 털어놓으면, 아주 시원시원하게 좋은 해결책을 내놓곤 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딸은 내 전용 상담자였다.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 전도된 것 같지만, 때로는 아옹다옹 다투는 모녀로, 때로는 친구 같은 모녀로, 그렇게 살다가 오 년 전에 딸이 시집을 갔다.
이제 싸울 일이 없고 잔소리할 일도 없다. 서로 딴살림이니 밥을 짓든 죽을 쑤든 내가 간여할 일은 아니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결혼하면 아이들 살림에 간섭하지 않기로. 바르고 성실하게만 산다면, 말할 필요 없다고. 말해봐야 관계만 나빠지니까. 그 생각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편이다. 이제 나도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혼자 해결한다. 또 부모가 자녀의 결혼생활에 깊이 간여하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한다. 물론 도움을 요청하면, 마음과 여건에 허락되는 만큼만 도와준다. 서로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니까.
밖에 나가려고 신발장 문을 열었다. 분홍 하트가 박힌 투명한 비닐우산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우산을 펼쳐보았다. 촘촘하게 박힌 분홍 하트, 꼭 딸이 내게 보내는 사랑의 표식처럼 보였다. 공연히 눈물이 핑 돈다. 이상하다. 자식에게는 꼭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 않는 것일까. 마음이 흐물흐물해진다. 물어보고 싶다,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 이 무슨 온당치 못한 마음인가.
“엄마! 이 우산, 지하철역에서 남자 친구가 사줬어요. 분홍 하트 예쁘죠? 엄마는 절대 쓰지 마! 나만 쓸 거예요.”
불쑥 떠오르는, 오 년 전 비 오던 날 저녁 딸의 말이다. 잊었던 그 말이 눈덩이처럼 커져 집안에 굴러다녔다.
‘그래, 그 남자 친구와 알콩달콩 잘 살기나 해라.’ 혼잣말하며 비닐우산을 접었다. 이제 가을빛이 퍼지는 개울가나 발밤발밤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