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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Feb 01. 2024

햇빛을 받으며 봄을 느끼다

햇빛

     

점심 식사 후, 동행인들이 차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식당에서 나왔을 때, 햇볕이 맑았다. 날씨도 겨울 같지 않게 포근하고. 나는 카페보다 산책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두 흔쾌히 그러잔다. 다섯이서 근처 공원으로 갔다. 날 좋은데 햇빛을 받아야 한다고 누가 말했다. 이렇게 의기투합하기 쉽지 않다. 요즘엔 식후 카페에 가는 게 거의 코스 요리 같으니까. 


나는 카페문화를 썩 즐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밀폐된 그곳에서 커피와 빵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걷는 게 좋다. 때로는 차 마시며 담화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단 즐기지 않는다는 거다. 필요에 의해 갈 수 있고, 풍광을 느끼기 위해서 갈 수도 있다. 내겐 아주 가끔이지만. 사람의 취향은 모두 다양하니까 카페문화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진 않다. 


꽃눈을 달고 햇볕을 받고 있는 목련, 꽃눈을 깊이 숨긴 박태기와 영산홍, 금세 새싹이 돋아나올 것 같은 개망초가 푸른 하늘에 빛나는 해의 기운을 온몸에 받고 있다. 나도 심호흡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 따사로운 햇볕을 받았다. 세포가 오르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동행인들도 까르르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웃음 속에 섞인 햇볕이 공원과 푸른 하늘을 휘감았다 흩어졌다. 


꼭 봄 날씨 같아요. 누가 말한다. 난 동지가 되면 봄을 느끼는걸요. 내 말이다. 어머! 겨울도 오기 전에 봄을 느낀단 말이에요? 누가 또 말한다. 그럼요,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혼자만 알고 있었어요. 내가 또 말한다. 다시 와르르 까르르 소녀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웃고 떠든다. 족구장에 앉아 느릿느릿 걷던 비둘기가 우리들 웃음소리에 놀라 후드드득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쟤들 봐요, 몸이 무거운가, 금세 내려앉네요. 누군가의 말에 우리는 또 와르르 까르르 햇빛처럼 맑게 웃었다. 


걸으며 미리 느껴본다. 봄이 되면 저 개나리 울타리가 먼저 노란빛으로 장식되겠지, 꽃눈을 달고 추위를 견딘 목련도 피고, 빨간 박태기가 우리들 웃음처럼 화르르 피어날 거야. 영산홍도, 그보다 먼저 매화도. 꽃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매향은 아마 다음 달이면 맡을 수 있으리라. 벌써 봄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봄을 느낀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러니,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까.

 

공원을 몇 바퀴 돌아 메타세쿼이아가 양쪽으로 늘어선 길을 따라 내려왔다. 덱 깔린 산책로가 다시 나왔다. 햇볕이 그곳에도 내리쬐고 있었다. 도심에 이런 공원이 조성돼 있는 건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아니 도시의 정화를 위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마음의 여유가 없어 누리지 못할 때 많은 게 현실이다. 어머나! 이렇게 예쁜 길이 있네요, 앞으로 우리 자주 와요. 동행인 중 누가 말했다.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올 수 있으리라 장담 못해도. 


불면증이 있다는 한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오늘은 잠을 잘 잘 거라고. 이렇게 햇볕을 충분히 쬐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맑게 웃었다. 하얀 얼굴이 발그레했다. 햇볕을 받아서 그럴까, 걷느라 숨이 좀 차서 그럴까, 생각만 하고 묻지 않았다. 다 괜찮다. 숨이 약간 찰 정도로 걷는 게 좋다고 했으니. 


햇빛을 받으며 봄을 느꼈다. 물리적인 것뿐 아니다. 내 마음에도, 삶의 여정에도, 봄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퇴직 후 알게 모르게 침체되었던 의욕이 살아나는 듯했다. 누렇게 퇴색한 풀잎이 고갱이를 품고 있듯, 그 고갱이가 햇볕을 받아 푸르게 자라 가듯, 웅크리고 있던 의욕이 살며시 고개를 드는 듯했다. 다시 하늘을 보았다. 구름 몇 점 떠가는 푸른 하늘이 눈부셨다. 그래, 다시 봄이다. 내 인생에도 다시 또 봄이 온다. 


충분히 햇볕을 쬔 우리들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산책한 느낌을 한 마디씩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맛을 새롭게 알았다. 이야기는 길었다. 두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열정을 쏟아냈다. 따뜻한 마음들. 이야기에도 햇볕은 스며들어 있었고, 봄도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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