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상 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Sep 09. 2024

꽃분홍 바지, 하늘색 블라우스

제자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만남이다. 우리들의 만남이.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만남이 있던가. 악연이든 선연이든. 우린 당연히 선연이다. 좋은 인연, 아름다운 인연. 지금까지는 그렇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에게 글쓰기를 배우고 작가로 등단한 제자의 아들이 결혼한단다. 그 아들이 십 년간 사귄 신붓감은 대학 다닐 때 내 조교까지 한 제자다. 아들인 신랑 역시 도서관 수업에서 내 강의를 들었다. 또 신부의 어머니도 내게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 제자다. 즉, 신랑 신부와 그들의 어머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내 제자다. 그러니 특별하지 않은가. 


결혼 날짜만 알려달라고 했더니, 그럴 수 없다며 식사를 하잔다. 바쁜데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절대 아니라며 신랑 어머니가 시간을 내달라고 간청했다. 결혼하고 나면 만나기 더 힘들 테고, 결혼식 날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 걸 생각하니, 그러기로 했다. 그 마음이 아름답지 뭔가. 별로 좋은 선생이지도 않은 나를 이렇게 예우하는 게. 


설렜다. 두 사람이 사귀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혼까지 한다니 이보다 더 좋을까. 며칠 전부터 생각날 때마다 기도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혹시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랑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를. 누가 결혼을 돛대 없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 같은 노정이라고 했던가. 나 또한 그런 날들을 헤쳐오지 않았던가. 부부의 사랑만으로도 그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했다. 서로 더 사랑하기를. 


만나기로 한 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꽃분홍색 바지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보색 관계다. 사실은 나도 생각이 있었다. 옷 색깔이 보색인 것은 서로 다른 성이지만 어울려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옷차림이었다. 또 밝고 환한 느낌이 들면서 웃게 하려는 작전이기도 했다. 평생 동안 거의 무채색 옷만 입다시피 했던 내가 그런 옷을 입을 거라고 생각지 못해, 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작전은 성공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어머! 핑크색 바지를 입으셨네요, 하는 말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옷 때문에 모두 즐겁고 환한 분위기가 연출된 듯하다. 그만큼 나는 좋았다. 두 제자가 결혼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비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고, 우리 집에도 혼기 꽉 찬 아니 넘기고 있는 아들이 있잖은가. 그런데 삼십 대 초반의 두 젊은이가 결혼한다니 경사도 보통 경사가 아니었다. 


내 옷 때문에 한 차례 즐거운 대화가 오가고 난 후, 두 제자에게 덕담과 부탁의 말을 짧게 했다. 부탁의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끝까지 선생 노릇하느라 그랬을까. 바람직하지 않은 요즘 세태에 염증을 느껴서 그랬을까. 딱 한 마디만 했다. 보기만 해도 함함하다. 꼭 내 자식 결혼시키는 마음이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기특하기만 하다. 


맛있는 음식이 상 가득 넘치도록 놓였다. 네 명 제자가 나에게 주는 사랑의 마음 같았다. 각자 기도하자고 해놓고, 내가 기도한다고 바꾸었다. 간절히 기도했다. 두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결혼생활하기를. 눈물이 나올 것처럼 울컥거렸다. 두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고, 신랑 신부의 됨됨이 또한 잘 아는 나로선 기특한 마음이 들어 그랬을 거다. 식사 기도는 길면 안 된다. 짧게 마치고 앞으로도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 책 한 권을 사인해서 신랑신부에게 건넸다. 그들은 청첩장을 내게 주었다. 두 어머니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아주 특별한 인연이네요, 내 말에 모두 그렇다며 웃었다.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고, 배부른 덕담을 하고,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흐뭇했다. 마음은 꽃분홍이었고, 하늘은 내가 입은 블라우스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매거진의 이전글 햇빛을 받으며 봄을 느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