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외출했다 들어오니 현관문 앞에 커다란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택배는 아닐 테고.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몇 개 봉지에 각자 다른 채소가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쑥, 미나리, 방풍나물, 부추 등이었다. 깨끗하고 얌전하게 손질된 채소들, 봄 향기가 물씬 풍겼다. 고향의 내음 같기도 했다. 말랑말랑한 느낌이 가만가만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현관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쇼핑백 겉과 안을 살폈다. 쪽지 하나 붙은 게 없다. 누굴까.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긴 하다. 둘이다. 한 사람은 바로 옆집 영이네, 또 한 사람은 5층 민이네다. 나보다 15년쯤 아래의 이웃들이다. 우리는 몇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마주치지 못한다. 그것도 승강기 안에서나 겨우. 그럴 정도로 모두 바쁘다. 같은 또래가 아니니 만날 일이 더욱 없다. 그래도 어쩌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다.
새로 생긴 이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가끔 현관문에 빵이 담긴 쇼핑백이 걸려 있곤 했다. 오늘 팔고 남은 빵입니다. 맛나게 드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1층에 사는 이웃이었다. 우리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옆집 아랫집 현관문에도 쇼핑백이 걸려 있었다. 다음날엔 또 다른 집, 그다음 날엔 또 다른 집. 알고 보니 제과점을 하는 1층 이웃은 그날 팔고 남은 빵을 돌아가며 그렇게 이웃들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겨우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1층 현관문에 붙여 놓거나, 직접 쑨 묵 한 모 담아 걸어놓았을 뿐,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한동안 빵 담은 쇼핑백을 볼 수 없어, 장사가 잘 되나 보다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사했다는 소식을 다른 이웃에게 들었다. 그 이웃도 몇 달 동안 쇼핑백이 한 번도 안 걸려 나처럼 빵이 다 팔리나 보다 싶었는데, 누군가에게 이사 소식을 들었단다. 그 역시 얼굴을 본 적 없다고 했다. 여기서 먼 곳 어딘가에서 제과점을 한다는 말에 꼭 한 번 들러보리라 생각했는데, 십 년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못했다. 고마운 마음만 간직한 채.
5층 민이네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입주했다. 그때 민이는 유치원생이었다. 요즘 승강기에서 가끔 마주칠 때 있는데, 지금은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몇 년 전 어느 해 설날, 아파트 동 입구에서 우연히 만났다. 민이는 형과 함께 내게 인사를 했다. 세배나 다름없는 형제의 인사가 고맙고 기특해서, 그들에게 나는 세뱃돈을 주었다. 새해에는 더 건강하고 멋지게 자라라며.
그로부터 얼마 후 민이네는 멸치나 미역을 쇼핑백에 담아 현관문에 걸어놓았다. 친정아버지가 건어물 가게를 하는데,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많이 보내셨다는 쪽지와 함께. 가끔 겉절이를 했다고, 나물을 무쳤다고, 들고 오기도 했다. 말수가 없고 곱게 생긴 민이엄마 역시 일 년이면 네댓 번 마주칠 정도다. 하지만 마주치면 서로 반기면서 인사 나누는 이웃이다.
옆집 영이네는 재작년에 이사 들어왔다. 아이는 딸인 영이 하나다. 부부는 직장에 다니고 영이는 고등학생이다. 이사 오기 전에 찾아와 롤 케이크를 건네며 며칠 후 옆집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집수리하느라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는 마음과 함께. 낮엔 나가다시피 하는 내게 피해될 게 없을뿐더러, 이사 올 집 단장하느라 그런 것이니 마음 쓰지 말라며, 좋은 이웃이 되자고 말했다.
작년에 옥수수가 한 박스 들어와 몇 개 나누어주었다. 직장 다니느라 번거로울 듯해 아예 쪄서 갖다 주었다. 며칠 후, 시골에서 어머니가 보내주셨다며 오이를 비롯해 몇 가지 채소가 쇼핑백에 담겨 쪽지와 함께 현관문에 걸려 있었다. 문을 두드렸는데, 안 계신 것 같아 쪽지 남긴다며. 영이엄마에게 전화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지난겨울 영이네 모녀를 승강기에서 마주치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쇼핑백에 담긴 채소 봉지를 하나하나 꺼내며 생각했다. 민이네와 영이네 두 집 가운데 영이네가 틀림없다고. 건어물이나 미역이라면 민이엄마가 놓고 간 것이겠지만 채소니까. 깨끗이 손질된 걸 보니 영이외할머니 솜씨다. 그 귀한 걸 내게 나눠주다니. 냉장고 채소실에 넣으며 기도했다. 채소를 기른 손길과 나누는 손길에 백배 천배로 축복해 주시기를.
고마운 마음을 메모지에 간단히 담아 옆집 영이네 현관문에 붙여놓았다. 얼마 전에 휴대전화가 초기화되는 바람에 전화번호가 모두 없어져 전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문자가 왔다. 아주 조금이고 별 것도 아닌데, 맛있게 드시라고. 그제야 나도 긴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쇼핑백도 얌전히 접어 한 곳에 보관했다. 나도 혹시 나눌 게 생기면 저 쇼핑백에 넣어 전하고 싶어서다.
바쁜 현대인의 생활양식 때문에 이웃 간의 정이 사라지고 있다지만 그것도 아니다. 만나진 못해도 얼마든지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다. 현관문 앞에 놓인 쇼핑백이 이웃 간의 정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듯. 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역시.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진리다. 쇼핑백에 듬뿍 담긴 이웃의 정은 포슬포슬한 삶에 윤기를 주었다. 따스한 봄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