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행복했던 날

by 최명숙

십여 년 전이었다. 모 도서관으로부터 작가 양성 강좌를 운영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창작 강의를 선호하는 나는 망설일 필요 없었다. 마침 출강하던 대학이 나의 모교와 통합되는 바람에 창작 강의가 없어 아쉽던 참이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쳐 좋은 글 쓰는 작가를 많이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설렜다.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마땅히 배울 곳이 없어, 늦은 나이에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공부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안성맞춤인 강좌였다.


얼마나 기대가 컸는지 모른다. 강좌를 맡으면서 열과 성을 다해 운영했다. 처음에는 수강생 모집이 잘 안 돼서 간신히 폐강을 막는 정도일 때 있었고, 학기 중에는 결석하는 사람이 많아 딱 한 명으로만 수업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때, 가르치는 자로서 능력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자책감과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대학에서 수십 년 간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쳐 왔다는 게 허상 같았다. 학생과 일반 시민은 다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매 학기 강좌는 열렸고 해를 거듭할수록 수강생은 늘었으며, 몇 년이 지나자 단 몇 분 만에 수강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수강생이 몰렸다. 신청을 못한 사람들은 내게 또는 도서관에 전화해서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나와 수강생들의 사기는 더 올라 그 도서관의 특성으로 생각될 정도로 성장했다. 한 명 놓고 수업했던 날은 에피소드가 되었다. 그 소중한 한 명 수강생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진한 애정으로 남아 있다. 그 수강생이 결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다.


나는 조금 까다로운 선생이다. 제자들도 인정할 것이다. 작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글을 제대로 쓰는 작가를 양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글을 읽기 자료로 활용했고, 단어의 선택, 문장, 단락, 문장부호, 문맥, 나아가 소주제와 주제, 의미화하기 등 기본에 충실한 글을 쓰도록 독려했다. 시, 소설, 수필, 동화, 동시 창작을 학기마다 순환하며 강의했다. 소재에 따라 장르를 선택해 다양한 글을 쓰도록 한 것이었다. 작품 발표와 합평, 첨삭을 통해 문우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했다.


그 결과 십여 년이 된 현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덟 명 작가가 탄생되었다. 보통 한 학기에 15명 정도가 수강하는 것이긴 해도, 햇수로 본다면 그다지 많은 작가를 배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에도 기술했듯이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내용 있는 글을 쓴다 해도 나는 등단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자들 역시 내가 말하지 않으면 자의적으로 문예지에 투고하지 않는다. 선생이 인정하지 않으면 어디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토요일 도서관에서 여덟 명 작가와 글쓰기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나의 사회로 시작된 강연에 작가의 꿈을 갖고 있는 수십 명이 참석해 작가가 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좌우에 여덟 작가들, 아니 나의 제자들을 앉혀 놓고 진행하는 강연이었으니,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나의 감회는 어떠했겠는가. 순간순간 대견하고 울컥해서 금세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감동적이었다면 답이 될까.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잘되는 게, 본인 잘되는 것보다 더 보람 있고 뿌듯하다. 참여자들의 질문과 사회자인 나의 질문에 또박또박 생각을 피력하는 제자들 모습이 그렇게 기꺼울 수 없었다. 답변에 부연할 부분이 있으면 내가 슬쩍 얹어 보충해주었다. 시종일관 관심이 높았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예정된 ‘작가와의 만남’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작가를 꿈꾸는 아홉 살 어린이로부터 팔십 세가 넘은 어르신까지, 모두 같은 마음으로 만든 시간이었다.


이제 더 많은 작가가 탄생하리라. 수년 동안 꾸준히 써온 사람들이 제법 많으니까. 물론 작가가 되는 것보다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겠지만. 작가는 아픈 사람, 슬픈 사람, 울고 싶은 사람, 아니 행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신 아파주고, 슬퍼해주고, 울어주고, 행복해할 수 있어야 된다. 자기감정과 서사에만 빠져 독자와 소통이 되지 않는 글을 쓴다면 소용없지 않을까.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하되, 객관적이고 보편적 경험을 깊이 내면화하여 육화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역시 가르치는 사람에 앞서 작가로서 앞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덟 명 작가와 함께, 아니 이어서 탄생할 작가들과 함께 손잡고 더 성실히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제자들 덕분에 내 삶이 반짝거리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건 자아도취일까. 그래도 좋다. 그날만큼은 더없이 행복했다. 내가 문학과 사람의 삶을 사랑하며, 글 쓰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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