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포한이 졌기에 나는 책만 보면 욕심을 낼까. 요즘엔 버리기, 정리하기가 화두일 정도로 많은 것들을 버리는 시대이다. 옷, 가구, 물품 거기다 책까지. 본디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책은 더더욱 버리지 못하는 나는 아무래도 벽(癖)이 아닌가 싶다. 내 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해도 남들이 버린 책도 들여다보다 볼 만한 것이면 주워 올 정도니, 병은 병이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바닥까지 차지하고 있는 게 책인데.
확실히 나는 책에 포한이 진 모양이다. 그것은 어릴 적 책 결핍에서 온 트라우마가 아닌가 싶다. 교과서 외에는 읽을거리가 전혀 없었기에, 할머니 장바구니에서 나온 물건 싼 신문지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옆집 오빠의 중학교 교과서는 고급한 읽을거리였고, 환경정리나 채점을 돕고 난 후, 선생님이 도서실로 데리고 가 빌려주는 동화책은 신세계였다. 그때는 도서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가 지금도 궁금하다. 작은 교실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도서실에는 책이 꽤 있었건만.
담임선생님이 빌려준 동화책을 등잔불 아래서 읽노라면 할머니는 석유 닿는다고 그만 자라고 하셨다. 그때 할머니 말씀은 우리 집에서 법이었다. 흐릿한 등잔불을 끄고 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책 속의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달빛이 창호지를 뚫고 환하게 들어오는 밤이었다. 할머니가 잠든 걸 확인하자 책을 들고 봉당으로 나갔다. 밝은 달빛이 괴불주머니같이 작은 우리 집 안마당을 비추고 봉당도 환하게 비추었다. 그 달빛 아래서 책을 읽었다. 달콤하다고 해야 할까,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보름달처럼 가득 찬 기쁨이 가슴에서 일렁였다.
포한이 졌다는 말보다 그런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충만한 기쁨 때문일지도. 생각만 해도 가슴에 가득 차 넘친다. 그 느낌을 안고 평생 책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이 없다. 무슨 책이든 읽는다. 하고 있는 일이 책과 관련된 것이어서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여행을 가더라도 책 한 권쯤 꼭 여행 가방에 넣었고, 육아 조력하러 온이네 갈 적에도 책을 넣고 간다. 그걸 꺼내보지 못하고 그냥 올 때가 허다하지만. 차 안에도 책 한두 권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내 지적 능력이 커진 것도 아니건만.
삼 년 전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큰방에 있던 책을 작은방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책을 많이 버렸다. 대부분 문예지와 오래된 이론서 중 겹치는 것들이었다. 삼분의 일 정도 되는 분량을 버렸는데도 작은방에 책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허룩한 느낌이었는데 삼 년 가까이 흐르면서 다시 또 채워졌다. 필요해서 사는 책이 있고 작가들이 보내주는 책도 있으며, 월간 또는 격월간이나 계간으로 배달되는 문예지도 있다. 그러니 책은 넘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째서 남들이 버리는 책을 주워오는가 말이다. 이건 하지 말아야 할 짓인데, 책만 보면 호기심이 발동해 눈길과 발길이 머문다. 그리고 볼 만한 책이면 망설이지 않고 갖고 온다. 그렇게 가져온 책 중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비롯하여 명작들도 많다. 이제 주워오는 건 안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지켜질지 모르겠다. 요즘엔 재활용 버리는 날에도 책이 담긴 바구니를 애써 피하고 있으니 노력은 하는 셈이다.
또 한 가지 솔직히 밝힐 게 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쓰기 시작한 것인데, 엉뚱한 말로 변죽만 울렸다. 책 대출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도서관이 다섯 군데다. 그 도서관마다 책을 6권씩 빌릴 수 있다. 어느 때는 20권까지 빌려주기도 한다. 마지막 수요일에 빌리면 문화의 날이라고 해서 많이 빌려주기도 한다. 그러면 다섯 군데 도서관에서 책을 양껏 빌린다. 섞이지 않도록 서재 서가에 도서관별로 구분해 꽂아놓는다. 책을 읽을 때에도 한 권 다 읽고 다른 책을 읽는 게 아니다. 이것 읽었다 저것 읽었다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읽는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댄다. 난 멀티라서 그렇다고. 우습지 않은가.
그런 중에 한 가지 잘한 일이 있다. 한 번도 책 반납을 연체한 적 없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문자로 알려주기 때문에 놓치지만 않으면 연체할 일이 없다. 그것만큼은 꼭 지킨다. 세금을 연체한 적 없고, 관리비를 연체한 적 없으며, 오 년에 한 번쯤 날아오는 교통범칙금도 연체한 적 없다. 책은 당연하다. 내 사전에 연체란 없다. 수십 권 책을 이 도서관 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느라 정작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읽지 못하고 미룬다. 연체 안 하고 반납 잘한다고 해서 누가 상 주는 건 아니지만 준법정신이 강한 나의 단면을 보여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앗! 휴대전화에 문자가 떴다. 상호대차 신청한 책이 근처 도서관에 와 있다는 소식이다. 부랴부랴 이 글을 마무리하고 도서관에 가야겠다. 책에 포한이 져서 욕심낸다기보다 책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