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인이 말했다. 자기가 쓴 시에 대해 설명할 수 없으면 그게 시냐고. 오늘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써보기로 한다. 글쎄, 이게 뭐 글이 될까 싶지만 이번 주 글감이 ‘글’이므로 나도 이참에 ‘글’을 소재로 써볼까 싶다. 혹시 아나, 내가 이름난 작가가 되어 강연이라도 하게 되면, 누가 불쑥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 일이 생길지. 그때를 대비하여 생각해 보리라. 유비무환, 그것처럼 튼튼한 게 없잖은가.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이 될지라도.
비겁해진 것인지 나이가 들어선지 요즘 나는 무엇에든 따지고 싶지 않다. 내게 부당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런가 보다 넘긴다. 옆에 있는 이들이 왜 그냥 넘기느냐고, 옛날 성질 다 죽었다고 부추겨도 요동되지 않는다. 막연히 그러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니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고 만다. 정직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은 것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 나였고 현재도 그렇다. 전에는 따지고 들어 바로잡으려 했는데,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삶의 열정이 고갈되어서 아니고 힘이 달려서 그런 것도 아니다.
부당하게 대하거나 곡해해 말하는 사람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허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외부로부터 오는 반응은 나와 상관없다. 나의 문제일 경우엔 받아들이고 고쳐야 하지만. 고치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미적거리다 잊을 수 있고 하기 싫어질 수 있으므로. 나의 문제가 아니고 서로 다른 견해 차이로 생긴 거라면 조율할 필요가 있을 수 있는데, 요즘엔 그것마저 저어 된다. 곡해에 곡해를 거듭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따져서 바로 잡는 게 번폐스럽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라는데, 그것도 요즘엔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 같다.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왜곡해 해석한 사람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옳고 그름을 대화로 따져볼 여지가 있고 이견을 조율할 수도 있다. 무조건 차단! 그건 아니다. 동화 ‘키다리 아저씨의 정원’에 나오는 키다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정서적인 글쓰기인 문학적 글을 쓰는 사람이. 따지고 바로잡는 게 힘들다는 걸 절실히 깨달으면서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깊어졌고, 오래전 꿈과 현실적 바람이 손잡게 되자 망설임 없이 문학에 뛰어들었다. 문학은 꿈이고 미래며 희망이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되 이상을 바라보는 게’ 문학이다. 이것은 내게 문학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해달라는 사람들에게 앵무새처럼 하는 말이다. 충분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그래서 좋다.
혹시 사람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문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현실’이라는 우주에 서서, 그곳에 사유의 추를 깊이 드리우고 헤집어 보면서도, 함몰되지 않는 게 문학의 본질이다. 오히려 고개 들어 눈물 삼키고 이상을 바라보며 꿈과 미래 그리고 희망을 품는다. 현실이 부정적이어도 휩쓸리지 않고 문제를 발견해 조곤조곤 따지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직접 사람을 맞대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의견을 말하는 게 문학이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이나 들은 것 그리고 사유 등을 통해 생긴 견해를, 다양한 문학 형식을 빌려 글로 표현하는 일이 쉽진 않다. 무엇보다 독자의 관심과 호응을 얻어야 하는 게 어렵다. 일부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흥미 본위로 글이 흘러선 안 되고, 교훈이 문학의 기능이기는 하나, 수필 형식 외에 직접 드러나면 맥이 빠진다. 글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기법이 존재한다고 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직접 사람과 맞닥뜨려 따지고 해명하거나 교정하기보다 문학 형식을 빌려 말하는 게 낫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글을 씀으로써 웬만한 갈등은 다 풀린다. 자잘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서 괴롭힐 때 있으나 그것마저 없으면 무슨 재민가 싶어 수용한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글을 쓰지 않을 때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인생에서 힘든 일을 만나 병원에서 먹고 잘 적에도 노트북으로 글을 썼다. 일부 사람들은 나의 행위에 부정적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느냐, 모두 거짓일 거다,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등등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억울했고 속상했으며 분노가 일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글의 힘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글쓰기가 그런 나의 마음을 구원해 주었다. 글을 왜 쓰느냐고 물을 때 많은 작가들이 대답하는 말이다. 나도 그 말이 가장 적확한 답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역시 삶은 아픔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견디는 일이고 그것이 기쁨이라는 걸 알았다. 글 쓰는 과정을 통해 근육이 생겼다, 글쓰기와 삶을 견디는 근육이.
내게도 위기는 있었다. 병원에서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생겼다. 가장 가까운 이와 한 사별이다. 그 때문에 거의 5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새로운 글을 쓰진 못했지만 그동안 책을 세 권 출간했다. 연구서, 이론서, 산문집. 각각 한 권씩이었다. 모두 전에 써놓았던 글을 다시 다듬었다. 퇴고 과정도 창작 못지않게 집중을 필요로 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문장으로 어떻게 잘 나타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순간만큼은 슬픔을 잊곤 했다. 그 ‘잊음’이 순간순간의 삶을 살게 했다.
그로부터 다시 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 개인 저서 세 권과 논문집 포함 공동 저서 20여 권을 출간했다. 이제 쓰는 즐거움이 더 커지고 있다.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려 힘들이지 않고, 나와 어울리려 하는 사람 거부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글을 쓴다. 글 쓰는 시간에 나다운 나의 내면과 만나고 성찰하며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견딘다. 또 사랑하며 행복을 느낀다.
내게 부당하게 해도 따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글을 쓰는 이유까지 장황하게 서술했다. 글이라는 게 본디 그렇지 않은가. ‘영이가 종로에 갔다’ 한 문장으로 소설이 되고 시도되며 수필도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고, 이 글이 산문이므로 결미에서 의미화한다면, 한마디로 나는 글을 쓰는 게 좋다,라고 할까. 유아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적당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設)을 말했는데, 그도 아마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진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