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설을 앞두고 어김없이 한과 한 상자가 왔다. 강릉 현덕사 주지인 현종스님이 보내셨다. 전날 전화해서 “맛있게 잡수이소”했다. 스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에고, 뭘 자꾸 보내십니까?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도 민망하게.” 내 말은 항상 똑같다. 봄에 개두릅이 날 적엔 개두릅, 여름철에는 옥수수, 설과 추석에는 강릉의 명인이 만드는 한과를 한 상자씩 보내신다.
스님과 교유하게 된 게 사 년 전쯤이다. 사 년 전 이맘때 강릉으로 여행 갔을 때다. 동행했던 선생님이 강릉에 사발 커피 내려주는 스님이 계시다는데 같이 가보잔다. 절에서 마시는 커피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고. 나는 커피를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오대산 자락에 있는 곳이니 서울로 올라갈 때 들르기로.
강릉에서 이십여 분 달리니 현덕사 입구가 나왔다. 길을 좁다랗지만 깨끗하게 손질돼 있었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은 걷고 싶을 정도로 예쁜 길이었다. 금세 다람쥐가 나올 것 같았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쟁쟁하게 들릴 것 같았으나, 아직 겨울 끝자락인지라 추워 창문을 열지 못했다. 곧 봄이 오면 현호색과 괴불주머니 같은 꽃이 지천으로 필 산길이었다. 그 길 끝, 산자락 중턱에 현덕사가 있었다. 아담하고 소란스럽지 않은 절이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사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단청이 고아했고 봄기운을 품은 햇살이 마당에 지붕에 마루에 쏟아져 퍼졌다. 강아지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쳐다보았다. 대웅전을 보고 내려와 옆 건물 계단으로 올라가 기웃거려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피는커녕 사람 구경도 못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절간 같다는 말을 실감하며 천천히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돌릴 때였다. “커피 한 잔 하고 가소.” 뒤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바로 우리가 기웃거렸던 건물이 다실 겸 응접실이고 스님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수백 권 족히 되는 책이 한쪽 면을 메우고 있었고, 긴 다탁, 그 위에 놓인 찻잔이 눈길을 끌었다. 스님은 앉으라며 바로 물을 올렸다. “여기서 사발커피를 내려주신다면서요? 방송에서 신문에서 다 봤어요.” 같이 간 선생님이 말을 꺼냈다. “그렇소. 녹차도 됩니더. 뭐 드시겠소.” 우리는 마침 강릉 안목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지라 녹차를 마시기로 했다. 눈이 맑고 표정이 순박한 스님은 전혀 거리를 느낄 수 없게 편했다. 한 시간 족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강릉에 갈 적마다 시간이 되면 현덕사에 들러 차나 커피를 마신다. 그 담백하고 맛있는 점심도 먹는다. 절에 온 신도들과 템플스테이 하는 사람들 모두 모여 점심 먹을 때, 스님은 나를 소개하곤 한다. “국문과에 재직하고 내 글 선생님인데 예수쟁입니더.” 예수쟁이라는 말에 모두 웃음이 터진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만든 각종 나물과 된장국이 몸과 마음을 말갛게 맑히는 것 같다.
언젠가 오대산 월정사에 다녀오면서 찐빵 한 상자를 사 가지고 현덕사에 들렀다. 찐빵 상자를 건넸다. “지 찐빵 좋아합니더.” 그 모습이 누나가 나갔다 집에 들어오면서 간식 사 온 걸 받아드는 남동생 같았다. 스님은 나보다 두 살 아래다. 처음부터 우리는 무슨 인연인지 동기간 같은 친밀한 정을 느꼈다. 스님도 그랬단다. 함께한 시간과 정이 꼭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며, 모두 다 인연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다.
템플스테이 최우수 사찰로 뽑힌 적 있는 현덕사 다실에는 ‘억지로라도 쉬어가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스님이 출간한 책 이름이기도 한데, 템플스테이 할 때도 아무런 규정이 없다. 예불에 참여하고 말고도 자유, 포행도, 그 외의 모든 것도 자유다. 자유롭게 몸과 마음을 쉬다 가면 되는 곳이다. 그래서 찾았던 사람들이 만족하고 돌아가는지 모른다. 스님의 사유나 삶의 자세도 그렇다. 동물도 식물도 사람도 어느 누구의 구속 없이 천연성품 그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는 것 같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과를 하나 꺼내 입에 넣는다. 사르르 녹는다. 누구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다 녹는다. 원망도 녹고, 피곤함도 녹고, 녹여내야 할 것 모두 다 녹는다. 끝에 달달한 조청을 느낀다. 그 맛처럼 인생의 달콤한 정을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 나는 무엇으로 사람들의 아픈 마음 녹이고 달콤한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현덕사에서 바라보았던 파란 하늘과 포행 길의 용담 그리고 노랗게 피던 산괴불주머니가 생각난다. 작약과 불두화도. 봄이 되면 불현듯 그곳에 가고 싶다. 하룻밤 묵으며 별 보고 산 향을 마음껏 느껴보고, 세파에 물든 삿된 마음을 말갛게 맑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