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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아찔했던 옛날의 기억 속 남자

빛과 소금

by 최명숙

빛과 소금, 내가 교회 다니면서 가장 자주 들은 소리야. 성경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기록되어 있거든. 성도는 빛이고 소금이라니, 이처럼 멋진 말이 있을까. 귀에 박히도록 들으니 나도 모르게 이야기 중에 빛과 소금을 언급하곤 했지. 그 의미를 새기면 새길수록 쉽지 않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또 듣고 언급하면서 나도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었던 모양이야. 교육이 중요한 이유지.


오늘은 경험과 관련된 빛과 소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 순전히 나의 경험에 의한 내 견해일 뿐이야. 성경과 의미가 다르고 말고는 논외로 하고.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라잖아. 견해가 다 다르니까. 저 옛날 러시아에선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는가 하는 걸 가지고 신학자들이 다퉜다고 하잖아. 우습지? 몇이 앉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힘들게 밥 벌어먹을 일이 없으니까 심심해서 그런 거 갖고 다툰 게 아닐까. 하긴 뭐, 우리 선조들도 예외는 아니야. 작은 견해 하나 가지고 당파싸움을 했으니까. 지금이라고 다를까. 마찬가지야. 그러니 내가 경험한, 빛과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듯해.


삼십 년도 더 넘은 이야기야. 동생이 타던 자동차를 내가 물려받았거든. 막 운전면허를 따고 난 지 한 달 되었을 때였어. 차종이 그래, 프레스토라고 브레이크가 약간 밀리는 차야. 하지만 차 이름만 봐도 알겠지? 프레스토, 빨리 달릴 수 있는 당시로선 꽤 괜찮은 차였지. 동생이 고모부한테 물려받아 몇 년 타다가 거의 폐차 직전의 차를 내게 준 거야. 연습용으로 쓰라고. 사실, 운전만 조심해서 하면 연습용 그런 거 필요 없어. 처음부터 새 차 사는 게 오히려 안전해.


그 차의 장점은 속도가 잘 나는 거였고, 단점은 브레이크가 밀리는 거였어. 글쎄, 내가 가지고 있는 프레스토는 그랬다는 거야. 또 그때는 자동변속기가 나오기 전이라 모두 수동이었지. 클러치와 액셀레이터를 절묘하게 밟아야 시동이 꺼지지 않는. 지금도 수동변속기 차를 타는 사람이 있지만 거의 자동변속기 차를 탈 거야. 신세계거든. 아무튼 내 첫 차는 수동변속기를 달고 있는 폐차 직전의 프레스토였어.


지방에 있는 대학에 출강하는 새내기 강사 시절,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자가용이 생기니 얼마나 편하겠어. 지방이라 도로상황이 나쁜 것도 아니고. 여행 삼아 놀이 삼아 룰루랄라 신나게 프레스토를 타고 다녔지. 차는 집과 같았어.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자기도 했어. 야간 강의까지 마치고 돌아오는데, 시가지를 벗어나자,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없는 거야. 약간 무서웠지. 가로등도 없어. 달빛조차도 없는 그런 칠흑 같은 밤.


그것뿐이라면 내가 왜 이 글을 쓰겠어. 담력이 있다면 있는 내가 깜깜한 밤이라고 운전을 못할 리 없잖아. 기막힌 일이 생긴 거야. 시가지에선 몰랐어. 차 라이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무슨 일인지 불이 다 나갔어. 시내를 벗어나자 앞이 깜깜한 거야. 내 눈이 어떻게 된 줄 알았어. 실내등을 켜봤어. 그건 들어왔어. 사물을 보는 데 문제가 없었지. 이제 차를 어디에 세울 수도 없고, 정비소에 갈 수도 없었어. 지금 같으면 애니*를 부르면 되잖아. 그때는 그런 서비스도 없던 시절이야. 망연자실했지.


비상등을 켰지. 다행히 비상등은 들어왔어. 될 수 있는 한 차를 도로 갓길에 붙여놓고. 한참 동안 그렇게 혼자 있었어. 무서웠어. 옆엔 높은 산이 꺼멓게 서 있고, 사람은커녕 차 한 대도 지나지 않는 지방 도로. 기도만 했어. 무사히 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믿음이 부쩍 돈독해지는 순간이었지. 회개도 했어. 어릴 적부터 잘못한 것 다 기억나는 대로 주워섬겼어. 기도하다 찬송 부르다 다시 기도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차 한 대가 빵 소리를 두 번 울리더니 내 앞에 멈춰 서는 거야. 내가 예쁜지 안 예쁜지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앞 차에서 남자가 내렸어. 이상하지? 무섭지 않았어. 구세주가 따로 없는 거야. 차에서 내리진 않고 차창을 내렸지. 남자가 물었어.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는 투박했지만 정 있는 어투였어. “라이트가 안 켜져요. 불이 나갔나 봐요. 깜깜해서 운전을 못하겠어요.” 남자는 다시 말했어. “앞에서 천천히 갈 테니 따라오세요. 조금 가면 아는 정비소가 있으니 거기서 라이트 교체하고 가세요.” 뉘 집 남편인가, 누구 오빤가, 저리 친절한 남자는 말이야.


남자는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갔어. 비상등 불빛이 구세주나 다름없었어. 두렵지 않았고 콧노래까지 나올 지경이었어. 껌뻑껌뻑 껌뻑이는 비상등. 그뿐인가. 앞차에서 비추는 불빛으로 어렴풋이나마 저만치 앞도 보였지. 그 불빛을 따라가면서 얼마나 감사 기도를 했는지 몰라. 그땐 휴대전화가 있었지만 걸고 받는 것만 되던 시절이었어. 그거 있잖아. 냉장고 폰이라는 거. 인터넷은 되지 않던. 집에 말해봤자 걱정만 할 것 같아 말도 못 했던 거지.


앞 차의 불빛을 따라 정비소에 도착했어. 남자는 닫힌 정비소 앞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어. 나는 차에서 내려 깜깜한 하늘을 보았어. 별빛이 얼마나 곱던지. 별빛이 곱게 보였던 건, 위급한 상황에서 한숨 돌렸기 때문일 거야. 남자가 다가와 말했어. “지금 나오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정비소 사장이 제 친구거든요. 큰일 날 뻔했어요.” 남자가 싱긋 웃었어. 오빠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어. 오빠라고 막 부르고 싶었다니까. 그럴 정도로 믿음직했어. 그 뉘 집 남편, 알 수 없는 여자의 오빠인 그 남자는 정비소 사장이 와서 라이트를 교체해 줄 때까지 같이 있었어. 그 남자가 바로 빛이고 소금이지 않았을까.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하는 사람 말이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재밌어? 시시하다고? 그 남자와 로맨스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고? 칫! 내가 볼 때 남자는 쉰 살이 거의 돼 보였고, 나도 그때 결혼해서 남편이 두 눈 시퍼렇고, 토끼 같은 새끼들이 깡충깡충 뛰어다닐 때였는걸. 하여간 어떻게든 엮어 보려는 태도 좀 버려! 그냥 순수한 이야기로 들어줄 순 없는 거야! 끄읕, 이만 끝. 아, 갑자기 그 남자 얼굴이 화아악 떠오르네. 신기하다. 사람 좋게 생겼어, 꼭 누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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