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만나는 날>이라는 글을 써서 발행한 적이 있다. 9월 8일이었다. 미국에 초청강연 갔을 때, 엽렵하게 챙겨준 당시 회장이며 수필가인 김 작가, 그녀 만나는 꿈을 꾸고 쓴 글이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한 달 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 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반갑고 놀랍던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시월 끝자락, 드디어 그녀가 왔다. 우리 만남은 11월 3일에 이루어졌다. 하루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시차 적응 문제가 있고 급히 처리할 일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 낙엽이 길바닥에 뒹굴고 가을비까지 내려 스산한 날씨였다. 반대로 마음은 들뜨기만 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꿈속에서처럼 그녀를 꼭 안아봐야지, 보고 싶었던 마음을 어떻게 전달할까, 아니 전달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만나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게, 꼭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가 보다. 그녀와 만난 게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었으니까.
태평양을 왼쪽으로 끼고 달리던 도로, 도로만큼이나 주고받은 길고 긴 이야기, 공감, 친밀도, 배려, 우정, 짧은 시간에 형성된 신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도 반가울 것 같은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니. 연애하는 감정이 이럴까. 몇 년 전 함께 지내던 날들이 소환되면서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했다. 유달리 내가 감성적이어서가 아니다. 진심으로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 같은 감정일 거다.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포옹했다. 한참 그렇게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게 우리 삶의 여정이라 해도, 만남과 헤어짐에 눈물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리라. 기뻐도 눈물, 섭섭해도 눈물. 눈물처럼 진실한 감정이 또 있을까. 악어의 눈물도 있다지만. 그건 우리와 거리가 멀다.
만나기 전 아침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파주에 있는 어머니 묘소에 갈 거란다. 내가 선뜻 나섰다. 동행하기로. 파주 광탄면까지 차편이 여의치 않을 듯해, 운전을 자처했다. 그녀는 힘들 거라고 만류했지만 그녀가 나를 태우고 달리던 날을 떠올리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한시바삐 만나고 싶었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함께 가기로 했다.
파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쉴 새 없이 계속되었다. 눈물이 그렁거리다가, 설레었다가, 감동했다. 세상 살면서 진솔한 사람을 몇이나 만나게 될까. 이해타산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경우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녀와 나는 그럴 일이 없었다. 서로 고마워하고, 기꺼워하였으며, 감격했다. 일산을 지나 파주로 가는 길은 단풍으로 울긋불긋했으나 우리는 풍경을 그냥 스치고 말았다. 그만큼 우리의 만남이 더 의미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뵙고 내려오는데,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져 있었다. 비도 한두 방울 던지고. 인생이란 게 어떤 것일까.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아직 명쾌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숱한 이별과 만남이 우리에게 있을진대 그때마다 초연하지 못하는 미숙한 인간이 나다. 유난히 이별을 힘들어하는 내 감성의 발원지는 어딜까. 어릴 적부터 겪었던 이별,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기억조차 없는 그 이별로부터.
파주까지 갔는데 그냥 돌아오긴 어딘가 아쉬웠다. 자운서원과 마장호수를 염두에 두고 운전했다. 그러다 마장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나는 캐모마일, 그녀는 커피. 뿌옇게 비안개가 내린 호수는 잔잔했다. 비가 사부작사부작 내렸다. 비만 아니라면 덱 따라 호숫가를 한 바퀴 걸으련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진하게 나를 자극했다. 불면을 감수하고 커피를 마실까 갈등하다 멈추었다. 그건 무모한 짓이 틀림없으므로.
그녀는 호수에 내린 비안개를 보고 비로소 단풍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아름답다고 말했다. 발갛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 당단풍은 아기손바닥처럼 작았다. 갈색으로 퇴색된 나뭇잎, 우비를 입고 걷는 몇몇 산책자. 모두 호숫가의 본래 풍경처럼 어울렸다. 이야기를 나누다 단풍을 보고 호수에 시선을 던졌다. 자운서원에 가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어디 갔을 때, 한두 군데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다음에 올 기회를 주는 거니까.
서울로 들어오는데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해가 짧다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한 번 만나고 헤어지는 건 아쉽다. 8일 점심때 남한산성에 가자고 말했다. 그녀도 좋단다. 우리는 거기서 단풍을 보기로 했다. 단풍이 그날까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고국의 단풍을 제대로 보고 갈 수 있었으면 한다. 내 마음대로 될지 그건 미지수다. 단풍도 가장 고운 날은 단 하루이지 않던가. 더구나 바람이 불고 비가 많이 오면 금세 떨어지고 말지 모를 일이다.
그녀를 만난 지 사흘이 지났다. 오늘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분다. 모레 함께 갈 남한산성의 단풍이 다 떨어질까 걱정스럽다. 단풍이 없어도 우리의 우정은 그대로일 테지만. 그녀에게 작은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내 마음이다. 오늘, 오후에 9월 8일 발행했던 글을 그녀에게 보냈다. 꿈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래서 좋은 꿈을 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