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있게 버린다'는 게 가능할까?
아파트 내 분리배출 공간을 살펴보니 "양심껏 버리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분리배출 잘 하라, 종량제 봉투에 버려라, 라는 말인 걸 알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양심 있게 버린다는 게, 가능한가? 새끼에게 먹이겠다며 플라스틱 조각을 왈칵 쏟아내는 알바트로스를 볼 때, 100kg의 쓰레기가 발견된 임신한 향유고래의 위장을 볼 때, 모래사장에 박혀 있는 철 지난 로고가 박힌 신라면 비닐봉지를 마주칠 때, 우리는 '양심'을 얘기할 수 있을까?
뒷산에 불이 나면, 마을 사람의 용기, 시민의식, 선한 영향력에 기대어 불을 끄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이 심각한 쓰레기 문제를 두고 우리는 누군가의 용기, 누군가의 시민의식, 누군가의 ‘선한’ 의지만으로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걸까.
누구도 자신이 버린 비닐봉지가 500년 동안 끈질기게 살아 남아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가길 바라진 않는다. 바다 건너 알바트로스의 배에서 발견되길 기도하지도 않는다. 굳이 굳이 환경을 오염시키겠다는 굳은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일회용품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한번 쓰고 버릴 제품을 만들고 포장해대면서, 왜 내 '양심'을 운운하는 건지.
퇴근길에 들른 마트에 진열된 겹겹이 포장된 과일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20대 직장인, 급식으로 나온 제육볶음과 우유를 먹어야 하는 10대 학생의 양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지 오래다.
'인간의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므로, '버린다'는 것부터 살펴보자.
'버리다' [동사]
「…을 …에」
가지거나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는 물건을 내던지거나 쏟거나 하다.
'버리다'의 용법을 살펴보면 「…을 …에」가 붙는다.
활용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 사놓고 한 번도 못 입어보고 질린 옷을 바다 건너 개발도상국의 한 마을에 버린다.
· 유통기한이 지나 버린 5색 아이섀도 팔레트를 수십억 톤 쓰레기가 넘쳐 나는 소각장에 버린다.
· 멀쩡한 휴대폰을 고래 뱃속에 버리고 새로 나온 휴대폰을 산다.
에바네스코! 델레트리우스!
차라리 쓰레기에 대고 해리포터 마법세계의 마법주문을 외우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마법사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스름한 저녁이라 못 본체라도 하려는 걸까? 일몰 후 쓰레기 배출이라는 규칙에 맞게, 해만 지면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길가에 쌓인다. 못 본체 하기엔 투명 플라스틱 봉투에 동동 메인 쓰레기 더미가 비닐 속에 갇혀 자꾸만 말을 건넨다.
우리가 양심을 챙겨서 버리든 양심까지 버리든, 중요한 건 버려진 쓰레기는 반드시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바다, 공기 중, 육지, 땅속, 바다거북의 코, 앨버트로스의 위장, 임신한 향유고래의 뱃속. 어디가 될진 아무도 모른다.
탯줄을 자름과 동시에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한 무수히 많은 쓰레기들,
이들은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남아있을까.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