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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변천사

by 김운용


" 세월은 2~30대에는 시속 2~30km로 5~60대때는 시속 5~60Km로 속도로 달린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 나이에 따라 세월의 속도가 차이 난다는 말 갈수록 실감이 난다.


그런데 세월의 변화를 실감 나게 하는 표현을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하나 더 추가해야 하지 않나 싶다.


90년대엔 90km, 2000년대엔 200km 아니 2000km 이상으로 빠른 변화를 강요하는 속도전의 시대다. 적응하지 못하면 그 속도만큼 뒤쳐지고 빠르게 늙어간다.


누군들 늙지 않을수 없건만 다들 빠른 것만 요구하니 세월 참 야속타!




60살에 맞는 첫 번째 추석.

다른 속사정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처음으로 차례도 지내지 않고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추석은 설, 한식, 단오와 함께 중요한 우리의 명절이라 했으며, 그중에서도 추석은 말 그대로 가을 추수를 끝내고 올 한 해의 노고를 위로하고 내년에도 역시 풍년을 기원하는 대동제와 같은 축제이자 기원제를 지내는 날이다.


두레와 같은 협동으로 지은 농사 다 같이 추수해서 그 쌀로 떡과 음식을 만들어 함께 제를 지내고 놀고 휴식하는 날이었다.


집 떠나 타향살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형제자매 자식들을 기다리면서 며칠 전부터

설레어하며 밝고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부모의 마음 그것이 추석이다.


추석날 전후의 풍경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를 따라 이미 오래전부터 달라져왔지만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며 설레던 그때를 경험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추석이 그립다.




1970년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그때는 가족 공동체 행사답게 각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일주일 전부터 추석 준비로 바빴다.

차례상을 차릴 제수와 제반 준비를 위해

아버지는 제기를 닦고 집안 청소를 하고 조상들의 산소에 가 벌초를 하셨다.


남녀 구분 없이 자식들을 데리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게 하고 난 후 장터에 가서 생선이며 집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을 사신 다음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가자며 머리를 맘에 안 들게 잘라 삐죽이 입이 나온 우리를 중국집으로 데려가셨다.


집에 오신 아버진 제수에 쓸 햇곡식과 밤 대추 등을 광주리에 담아 깨끗한 장소에 따로 보관한 후 추석 전 날 동네 사람들과 분담해 키우던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부위별로 고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나물과 채소를 씻고 포 등 제수음식재료들을 분류해 청결하고 서늘한 장소에 보관하셨다.


어머니는 불려놓은 떡쌀을 방앗간에 가 빻아온 후 치대고 치대 찰지게 반죽을 해

저녁에 빚을 송편 준비를 하셨다. 송편 삶을 때 솔가지를 왜 송편에 넣는 거냐 묻는 여동생에게 솔향 내가 나니 다른 잡내가 안 나서 좋고 달라붙지 말라그런거라며 설명해주셨다.

어머닌 바쁘셨다. 장터에 가서 형과 누나, 나와 동생의 옷을 추석에 입을 거라며 한 개씩만 사 오셨다.


우리집만 다른 집과 달리 너무 조용해 군대 간 형이나 시집간 누나가 혹시나 오는지 연신 어머니께 물었다.


저녁 늦게 어머니와 여동생과 나 셋이서 팥, 밤을 속에 넣어 송편을 빚었다.


옆집에선 친척들이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찾아와 시끌벅적 왁자지껄한데 우린 부모님 두 분 다 이산가족이라 찾아올 친척이 없어 적막하기만 했다.




1980년 고등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의 할 일은 많이 줄었다.

벌초와 이발 그리고 제기 챙기는 이외엔 할 일이 없었다


냉장고 및 가전제품이 들어와 어머니의 일이 편리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노동량은 늘어났다.


추석날이 가족들끼리 조상에 대한 제례를 지내는 의미로 축소되면서 제수준비라는 게 음식 만드는 일로 한정돼버렸다. 추석이 먹는 게 전부다 보니 음식 장만에서부터 설거지까지 오롯이 어머니의 일이 돼버렸다.


할 일이 없어 형 형수 조카들 오는 시간에 맞춰 버스 종점에 마중 나가는 게 나의 일이었다.


결혼한 자식들이 며느리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선물이라고 내복 같은 거 사들고 오지만 어머니의 노동량만 더 늘어날 뿐이었다.


거기다가 아직 진학이며 결혼도 못한 자식 걱정에 어머니의 뒤처리는 한 짐 더 늘어났다.


며느리들도 전날 저녁 늦게 와 자기애들만 챙기며 어머니가 준비해놓은 재료로 단순 조리만 할 뿐이니 어머니의 수고는 줄어들 줄 몰랐다.




2000년대 분가

노인이 된 부모님.


아버지 할 일은 이발하고 목욕탕 가시고 제기 챙기고 벌초 외에 변화가 없었다.


어머니 역시 절대 노동량엔 변동이 없었다. 추석은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 참아가며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날이다.


아들 며느리에 이젠 손주들도 훌쩍 커버려 밥그릇 숫자도 식사량도 증가해 죄송한 마음에

설거지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거들려고 하니 며느리 눈치가 보이셨는지 어머닌 얼른 아들 등을 떠민다.


추석 명절에 처갓집도 방문해야 해 서둘러 집을 나섰지만 용돈도 넉넉히 챙겨드리지 못했고 부쩍 노인이 된 부모님 걱정에 맘이 무거웠다.




2020년대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추석 차례를 지내기 위해 준비 하는일이 이제 나의 역할이 되었다.


제기와 병풍도 닦고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벌초도 하고 이발과 목욕까지 단정하게 마쳤다.

아내 또한 어머니의 노동량을 그대로 전수받아 차례상에 올릴 목록대로 음식을 만들었다.

온라인으로 주문 배달되니 장보는 수고는 덜었지만 형수들이 종교문제로 제사를 안 지내 제사 준비는 내 아내 몫이 돼버려 면목이 없어 그 옛날 아버지만큼 역할을 찾아 아내의 수고를 덜어보려 했지만 힘들었다.


형님들 내외는 전날 퇴근 후 잠깐 들러 제수씨 차례 지내시느라 힘드셨지요. 하며 봉투를 건넸었다. 맏아들 맏며느리만 책임지란 법은 없는데도 아내한테 정말 미안했다.


추석이 변해서 좋은 것도 아쉬운 것도 있다.


퇴계 이황은 형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유학자이면서도 간소한 제사와 차례를 강조하는 유훈을 후손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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