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의 교회사 1.

by 김운용


전라남도 담양하면 대나무의 주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대나무숲이 좋으니 죽녹원 같은 정원들도 많이 지어졌다.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낙향해 지은 조선 시대 옛날식 정원인 소쇄원, 가사문학의 대 가 정철이 유배되어 생활하던 송강정, 식영 정,그외에도 환벽당, 면앙정, 명옥헌,취가정 등 가사문학의 산실이 된 풍경좋은 숲과 정 원은 글을 쓰는 사람들 은 한번쯤 가 볼만한 곳이다.


호남평야의 젖줄 영산강이 담양 추월산에서 시작해 황포돛대 바람에 실려 사백리 굽이 굽이 흘러서 서해바다로 흐른다.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름모를 소녀의 가수 김정호의 노래비도 나온다. 김정호는 외조부이자 판소리의 명창 박동실의 고향인 담양 에서 태어났다.


숲이 좋고 물이 좋으니 담양엔 자연히 특산 물도 많다.

창평한과, 창평쌀엿, 대잎차, 청죽환, 죽향 딸기, 방울토마토, 죽향멜론, 시목단감, 죽 향비가림포도, 용면 한봉, 추성주,죽엽청주, 동충하초, 죽제품, 염장죽순 일일이 열거하 기도 힘들 정도다.


담양은 호남평야와 지리산맥의 경계에 걸쳐 있어 식재료가 풍부해 맛난 음식들이 발달 한 곳이다


담양읍 관방제림근처에 모여있는 국수거리,

창평면 창평시장안에 창평국밥의 원조 국밥 집들, 주문하면 주방에서 바로 먹을수있게 구워서 가져 오는 담양 돼지갈비와 소고기 떡갈비.

담양식 떡갈비는 소갈비살로만 만들어 두껍 게 부쳐서 갈비가 쫀득쫀득한게 맛있다.


창평엿은 마을사람들이 직접 모여 밟고 늘 이고 당겨 만드는 수제엿이라서 바삭해서 이빨에 잘 달라붙지 않고 달지 않아 먹기 좋다.


대통밥은 대나무 통 속에 쌀과 잡곡등을 넣어 한지나 천을 씌워 찌는데 담양의 전통 음식이다. 죽통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외 에도 죽순을 채로 썰어 버무린 죽순회무침 도 맛있다.



담양엔 광주민중항쟁으로 숨져간 젊은 넋 들이 잠들어있는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도 있다.


담양은 그것말고도 내겐 특별한 사연이 있는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않지만 단 한분뿐인 장인 어른의 흔적이 있는 처가가 있던 땅이 다.


담양군 창평면 슬로시티마을 입구에 있는 창평교회.

50여년전 장인어른이 장로로서 주관하여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설립한 교회다.

교회앞에 가면 아주 오래된 나이먹은 고목 이 교회를 처음 만들때의 고난을 대변하는 듯 안내자 처럼 우뚝 서있다.


장인어른의 고향은 북한의 황해도 사리원 이다. 사과의 주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밥대신 사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할 정도로 사과가 많이 나는곳이며 집집마다 사과나 무로 울타리도 삼았다고 한다.


황해도지방이 기독교를 빨리 받아들여 교세 가 발달한 곳이라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커 자식들을 일찍 서울이나 평양 일본등으로 유학을 많이 보냈 다고 한다.

김구선생의 고향이 이웃한 은률이고 안중근 의사도 황해도 안악이 고향인데 장인어른의 고향과도 멀지않다.


북한의 명산 구월산도 가까이 있다. 은율과 사리원 은 조선시대때도 노비들이 양반들을 습격해 반향의 땅으로 낙인찍힌 곳이다.

양반중심의 신분사회의 모순을 놀리고 풍자 하는 봉산탈춤도 은율 사리원이주무대였다.


조선시대 의적 장길산이나 임꺽정의 산채도 있었 다는 구월산의 풍광을 어릴때 소풍을 갔었다며 장인어른의 고향얘기를 장모님을 통해서 전해들 었다.

장인어른은 보안대에 강제연행 되었다가 풀려나신 이후로 북한의 고향얘기는 물론 고향에 두고온 형제들에 대한 언급도 거의 안하셨다고 한다.


사리원.

조치원 장호원과 같이 도시이름끝에 원자가 들어간 곳은 대부분 교역이 발달한 도시이며 주로 물류 파발마 봇짐장수들의 이동통 로여서 객주가 성행 했던 곳이다.


기독교도 빨리 보급되었고 향학열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장인어른의 집안은 부유하진 않았어도 과수 원을 해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 이었고 대대 로 기독교 신자여서 그 영향으로 장인어른을 경성, 지금의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장인어른은 해방되던 그해 1945년에 홀로 서울로 내려와 경성의전에 입학했는데 경성 의전은 지금 서울대 의대의 전신이다.

1926년생이니 생존해 계시다면 올해 아흔 여섯살 이시다.



경성의전에 입학하고나서 그해 초여름 6.25 전쟁 이 일어나면서 북쪽 고향에도 갈수없어 못가고 이산가족이 되어 남쪽에 혼자 남아 있다가 국군에 자원입대해 전선으로 투입되 어 교전중에 총상을 입어 한쪽 눈을 잃으셨 다.


제대후 의대학제가 육년제로 바뀌는 바람에 경성 의전 후신인 서울대 의대로의 복학이 불허가 됐는 데 장애인이란 이유가 큰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쪽 눈에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은 지금도 의대 입학이 거의 어려운 일 이지만 그때는 아예 불가능 했다.


크게 낙담한 장인은 종전이 되면서 휴전선이 가로 막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 어 고학으로 신학교를 다니며 약사면허를 취득해 서울에서 약국을 차리려 준비하던 차에 군대생활할때 선임 이었던 장모님의 작은 아버지 소개로 장모님을 만나 담양으 로 이주해 터를 잡으시고 약국을 차리셨다.


장모님 집안 역시 대대로 기독교신앙을가져 그 유래가 깊다. 구한말 무주군수를 하셨던 외증조 할아버지는 미국인선교사의 소개로 맏사위가 된 아내의 외할아버지를 미국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기대와는 달리 외할아버지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마을에작은 학당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손재주 가 좋아서 풀피리도 만들어 노래도 가르쳐 주고 풍금을 잘쳐서 교회 에서 연주도 했다 고 한다. 담배도 피웠다는 걸 보면 보수적인 교리에 적응을 못해 방황을 한 것 같다.


미국 신학교 유학파 출신의 인텔리인 외할아버 지는 밑으로 남동생 두 분이 있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은 후에 서울 모여대 총장을 역임했다고 하고 막내 동생은 여수에서 소 방서장을 했다고 하는데 그 분이 장인어른 의 군대선임이었다.


그분의 소개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만나 결혼을 해 낳은 막내딸과 내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