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인어른의 교회사2

by 김운용


장모님도 서울서 여대를 나와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중에 장인어른을 만나 결혼 을 한 후 연고도 없는 담양으로 이주를 한 것 이다.


집은 고서라는 곳인데 약국은 창평읍내에 개업을 했다. 그 당시 병원도 많지않았지만 마을사람들도 병원을 이용한다는게 쉬운 일 이 아니었다. 의전을 다닌 경험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다쳐서 급하게 약국을 찾아오면 간단한 수술이나 치료를 해주고는 치료비를 받지않고 무료로 조치해주기도 했다.


고향에서 부모님이 과수원을 했기 때문에 과수재배에 관심이 않아 직접 접붙이기를 시도해 품종을 개발해서 도움을 주니까

마을사람들로부터 의원님 의원님으로 불리 며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머리가 비상한 분이셨다는 얘길 장인어른의 처제인 처이모분들에게서 전해들었다.




집안 대대로 오랜세월 독실한 기독교신자 였기에 마을에 교회를 설립하는데도 앞장서 서 목사를 초빙해오고 예배당 건축하는데 재정도 전담해 2년만에 창평교회를 설립했 다.


집안에서도 맏사위로 처가의 경제를 책임졌 으며 처제들을 챙겨 결혼도 시키고 막내동 서는 신학대학까지 보내 지원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약국도 번창하 던 중 어느날 갑자기 보안대에 이유도 없이 끌려가 고초를 겪고나서 40여일만에 풀려 나셨다.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받은 내용을 직접 말 씀하진 않았는데 장모님의 다급한 요청을 받고 친척들이 나서서 청원을 해 풀려나셨 는데 도움을 준 친척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의사면허도 없이 불법수술 의료행위를 한 점과 마을사람들에게 과수재배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북을 선전했다는 간첩신고가 들어와 조사하려고 연행이 된것이라고 설명 을 했다고 한다. 어둠의 자식들이 판치던 그때는 보안대 군인들이 법절차도 무시하고

민간인도 강제로 연행해갔다.


뒤에 알려진 얘기지만 다른 약국을 운영하 는 분도 또다른 교회장로 이셨는데 그 분의 투철(?) 한 애국심의 발로로 인해 장인어른 이 고초를 겪게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분은 나중에 공화당쪽에 줄을 대고 정치 권과도 가까이 지내던 후광으로 광주에 큰 병원도 지었다.


아직 생존해있는지는 모르나 부와 권력을 이용해 광주시 기독교내에서 대단한 위세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물론 장인어른이 북한이 고향이라 굴러온 돌이 감히 건방지게라는 어처구니없는 텃세 까지도 작용했던 것이다.




인연은 있는가보다. 우리아버지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유로 보안대에 끌려갔다 어머님의 농성으로 풀려나셨던 일이 있어 장인어른의 일이 더 실감이 갔다.


이후 장인어른은 약국과 과수원을 팔고 40 대 후반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수료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 다.


담양과 멀지않은 광주시 두암동에 사재를 털어 부지를 매입하고 교회건물을 지었다

두암동은 광주시 외곽이라 서민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라 교회를 서립 운영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아 장인 장모 두분이 직접 선교 하시느라 거의 매일 밤늦게 귀가하셨다고 한다.


결혼후 장인어른이 설교하는 시간에 예배에 참여할때마다 느낀 일이지만 교회엔 헌금통 이 아예 없었다. 설교도 정치 관련된 언급은 일체 하지않았다. 장인어른은 일제때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 얘기와 고향얘기만 성경말씀 사이에 가끔 재미로 끼워 놓으셨다. 목소리가 좋아 서 마이크없이 설교하시는데도 뒷자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처이모부 교회에 다닐때 예배만 시작하면 여지없이 졸았는데 장인 어른이 설교할때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장인장모님 두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내 와 아이들을 데리고 삼십년전 처가집이 있 던 마을을 찾아간적 있었다. 하두 오래되서 아내는 자기가 살던 곳을 쉽게 찾지 못해 헤매다가 동네입구 커다란 느티나무밑에 사람들이 10여명 모여 있길래 차를 세우고 내려 정중하게 물었다.


" 말씀좀 묻겠습니다. 한 삼십년전쯤 사셨던 분인데 박○○씨라고 아시는 분 계시냐."


앞쪽에 앉은 사오십대쯤 되보이는 사람들은 누구? 서로를 돌아보며 의사를 확인하고는 글쎄요 잘모르겠는데 고개를 갸웃거린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려는데 박○○? 혹시 박의원님 찾는거 아니냐며 뒷켠에 있던 노인이 불러세웠다.


그러자 몇몇사람들이 아! 박의원댁. 거긴 알지 하며 그제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누구슈? 아까 그 노인이 내게 물었다.


서울사는 막내사윕니다. 했더니 날 따라오 슈 하며 노인은 오토바이를 몰고 농로길을 앞서 갔다.


한참을 가다 논 한가운데 야트막한 언덕위 를 가르치며 여기가 박의원댁 과수원 자리 요. 손으로 가리키고는 오던 길을 돌려 훅 가버렸다.




과수원은 그대로였다. 과수원입구에 차를 정차하고 한 삼사십미터쯤 올라가니 세로로 내린 철제 파이프로 만든 대문이 나왔다. 자물쇠로 잠궈져있어 집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철제파이프 사이로 집은 다 볼 수 있었다.


그대로네. 아내가 반가움 섞인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돌아가신 장인장모 그리고 아내와 형제들이 살던 곳이라 나도기분이 묘했다.


집안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겨놓은채 가까운 곳에 유명한 한복자한과공장이 있다 해서 차를 돌렸다. 아내의 기억에 따르면 부모님들과 친분이 있는 분이라해 들러보고 싶다고해서 한복자한과공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자가 있길래 머뭇대는 아내를 대신해 예전에 이 곳에 살던 박의원님 사위라며 지나는 길에 들렸다고 했더니


" 어머니 잠시 나와보세요. "


잠시 후 내실에서 장모님또래 지긋한 아주 머니가 나왔다.

박의원댁 막내딸이고 사위라고 했더니 반갑 다며 아내와 내손을 번갈아 잡는다.


형제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으로 한과 다섯 상자를 주문 가격을 치른 후 인사를 하고 나 오는데 쫒아나오더니 커다란 한과 두상자를 건네주시며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걸 하며 아내의 등을 두드렸다.




장인어른은 교회설립자이면서도 일체의 기 득권도 요구하지않고 목사직 세습도 안하고 고아나 다름없는 청년을 집으로 데려다가 신학대학까지 보내 당신이 설립한 교회 의 담임목사직을 인계했다.


시온중앙교회.

지금은 교회의 이름이 바뀌었다.


천식이 심했던 장인어른은 새벽에 기도하러 가시다 자신이 설립한 교회의 예배당 입구 계단에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그대로 운명하 셨다.


살아 생전 교회다녀라 기도해라 담배나 술 도 하지마라 등 신앙생활을 요구하시는 단 한마디의 말씀도 내게 하지 않으셨었다.


장인어른께 믿음을 저버린 큰죄를 많이 저질러 나중에 뵙게 되도 면목이 없을 듯 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