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특별한 약속이 없어 퇴근하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평소 밤늦은 시각에 귀가를 해 일찍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어머닌 미처 저녁식사 준비를 못했다며 빨리 차려주마 말끝도 채 마무리 짓지않으시고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천천히 하세요."
뚝딱뚝딱 도마위에 무와 파 두부 생선을 써는 어머님의 부지런한 손놀림 덕분에 길게 기다리지도 않고 두둑히 배를 채웠다.
처녀때 방아를 찧다 다쳐서 왼손 검지손가락 한마디가 없는 어머니의 손. 부엌으로 들어가 설겆이라도 도우려 할때 마다 손사레를 치며 내몰아 끔찍히도 아들을 아끼고 건사하려던 그 손맛에 못내 배가 빵빵해졌음에도 늘 두그릇의 밥을 해치웠다.
어머닌 언제나 밥그릇 속에 담긴 것보다 그릇위로 훨씬 높게 탑을 쌓듯이 밥을 담아 주셨다.
고봉밥.
덜어놓을라고 하다 어머니의 만류로 결국 한톨도 남기지않았더니
" 내속으로 낳았는데 아무렴 내 아들속을 모를까."
저녁을 먹고나서 어머니와 옥상에 올라가 평상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 밤하늘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의 부모 형제들하고 지낸 오래된 옛이야기에다 자식들 걱정으로 한숨까지 가득 보태어진 기구한 사연을 듣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 몇일동안 집을 비운 니 아버지가 어느날 꿈에 나타나서는 더덕을 한바구니 가득 들고와 품안에 안겨주더라."
그게 너의 태몽이라며 꿈이 하도 좋아서 크게 될거라 기대했다던 어머니는 애수의 소야곡을 나즈막하게 부르셨었다.
음정은 무시했지만 박자만은 하나도 틀림없이
♩그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
끝까지 불렀었다.
어머니와 올려다 보았던 밤하늘을 다시 기억하고 싶은데 평생을 자식들 걱정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가슴에 한 만 가득 안고서 어머닌 작년에 아버지곁으로 떠나셨다.(2020년 8월)
밤하늘을 바라보며 긴얘길 나누었던 그 밤 그 시간이 내가 어머님께 편안히 발을 뻗고 쉴수 있게 했던 짧은 효도였다.
어려서부터 떨어져 지내 모자지간에 정깊은 추억을 만들 시간이 없었기에 취직하고 몇년간은 어머님이 들려주신 옛날이야기를 묻고 또 물었다.
연대기를 써도 충분할 정도로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이제와서 그때 그 기억을 떠올려 어머니의 파란많은 연대기를 적어 본들 무엇하겠냐만은 내가 그때 어머니 나이가 되고나니 새삼 그립다.
2년전 가을
병세가 악화되어 더는 간병을 해드리기 어려워지자 형제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요양원으로 모셨었다.
요양원이 집에서 가까운 곳이니 수시로 오겠다며 어머닐 안심시켜드리고 어머니보는 앞에서
'요양보호사선생님한테 말하면 10분안에 달려오겠습니다' 란 거짓말로 달래드리고 편하게 계시라는 인사를 뒤로 한 채 낯선 요양원에 홀로 남겨놓고 무심히 돌아섰다.
얼마 후 다시 들른 요양원,
불과 몇일전만해도 어머닌 식당에서 조리사와 콩나물을 다듬고 계셨었는데
무슨 일이 생기셨나 갑자기 연락이 와 서둘러 차를 몰았다.
왠지 불안한 마음에 요양원 현관입구에 바짝 붙여 주차하고 요양원으로 들어서자
어머닌 현관문 앞 찬바닥에 농성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앉아계셨다.
아들을 보고 반가운 맘에 어린애같은 웃음을 짓다가 반색을 하시더니 괜히 아들을 귀찮게 했다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해 하셨다.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니 감정이 북받쳐 울컥하는 기분을 억누르고 일으켜안고는 휠체어에 앉혀드리고
요양원장을 불러 어떻게 된일이냐 경위를 물었다.
뭔가 켕기는게 있는지 원장은 같은 말만 빙빙돌리며 요령을 부리려해 CCTV부터 확인해보자 했더니 고장이 났다며 발뼘을 했다.
" 감독권한이 있는 기관에 신고해 경위를 제대로 밝힐테니 각오해야 할거다. 두번 말 안한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으름장을 놓자 직원들 부주의로 생긴 거라며 원장이 어머니 목을 켜안고는 할머니 죄송하다며 너스렐떨며 몇번이나 사과를 했다.
그길로 어머닐 모시고 요양원을 나와 집에서 한달 가량 쉬시게 하다 작은누나가 자신의 집근처에 방을 구해 반년 가까이 아침저녁으로 돌봐드렸었는데 누나도 일을 하고 있어 형제들이 다시 모여 이번엔 진짜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요양원으로 모셨다.
절친한 지인의 소개였고 한번의 경험도 있어 원장 담당간호사 담당요양사에게 각각의 안전케어를 단단히 약속을 받았지만
몹쓸 짓을 반복해 죄스러움에
매주 토요일 자식들이 순번을 정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가 계셨던 요양원은 집에서 차로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아 퇴근길에도 들렀었는데 그때마다 거동을 전혀 못하셨지만 인지능력은 좋았던 편이라서 눈웃음으로 반겨주셨고 잘 계시리라 안심했었는데 요양원에 들어가신지 이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닌 1926년생 팔자가 드세다는 호랑이띠다
열아홉에 시집을 와 시부모를 포함해 삼십여명이 넘는 대가족이 이웃하며 살고 있어 고단한 시집살이를 삼년이나 하셨다.
더군다나 시집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란 사람은 일본순사의 손에 이끌려 북해도라는 멀고먼 땅으로 강제 징용되어 갔다.
시집온 지 백일도 안된 새색시가 생면부지 낯선곳으로 시집을 왔는데 유일한 의지가지였던 남편이 멀마나 먼 곳인지도 모른채 생사조차 알수없는 위험한 전쟁터로 끌려갔으니 젊디 젊은 아낙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도 못 할 일이다.
" 형님은 부양가족이 많으니 내가 대신 갔다오겠소. 미안하오."
단 한마디만 짧게 남기고 징용의 길을 나선 남편이 원망스러워 밤마다 우셨다.
평생을 기다림에 가슴졸임으로 애태우신
여자의 일생.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느날 아침 출근길.
구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 내 구두닦으셨어요."
" 아니다. 니아버지가 딱딱하게 굳은 구두약을 라이타기름을 부어가며 녹여서 아침내내 닦더라.
아버지 미워하지마라."
어머님의 불후의 명곡을 불러 보고 싶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 만은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