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역에서 ○○여대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상가와 먹자거리로 유명하다. 이면도로라 해도 차량통행이 많고 중간지점쯤에 야외무대가 설치되있는 작은 공원도 있어
주말이 아닌 날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혼잡하다.
먹을 거 많고 물좋은 곳이라서 까치들과 비둘기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바로 두어달 전 쯤에도 까치들이 단체로 비둘기들의 보금자리인 고가밑과 ○○○○○공원으로 몰려와 무단점령을 하는 바람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양측간 치고받은 몸싸움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으나 비둘기들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까치들이 단단히 작심하고 기습적으로 날아와 점거를 하는 바람에 안심하고 휴식을 즐기던 비둘기들은 속수무책으로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특히 혼자있던 비둘녀들의 둥지들이 파손이 심해 급한데로 ○○여대 학생회관 난간밑으로 긴급대피했는데 비둘녀 L 역시 그날 오래동안 살아온 둥지를 잃었다.
다행히 어린 새끼와 자신의 몸은 털끝하나 상하지 않았지만 졸지에 둥지를 잃고 거리에 나 안게되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비둘남들과 이웃 비둘녀들이 애써 모아다 준 빵조각과 구호물품들을 가늘고 긴 목을 심하게 흔들며 냉담한 몸짓으로 거부했다.
비둘녀 L이 속한 모임의 대표인 비둘녀 C가 이재민비둘기를 돕자는 제안을 하자 비둘녀 A와 B도 아끼던 특별식 새우깡을 큰맘먹고 봉지채 가져왔다.
까치들의 기습점거가 있기 바로 전 날,
공원에서는 무명의 버스커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봄날같은 따뜻한 날씨에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 들었다.
주위 시선도 아랑곳않고 입맞춤을 나누는 젊은 연인, 유모차를 끌고 나타난 엄마들, 마실을 나온 노부부, 심지어 인근 정형외과에 입원중인 것으로 보이는 목발을 짚은 환자들까지 비둘기들의 땅은
마치 축제라도 열리는 것 처럼 후끈후끈 분위기가 달아 올라 들썩거렸다.
버스킹이나 작은 행사가 있는 날은 비둘기들 역시 풍요한 먹거리를 즐길수 있는 대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그동안 주로 땅에 떨어진 것들만 목을 구부려가며 줏어 먹어 왔지만 버스킹이 있는 날은 먹다남은 먹거리들이 봉지나 일회용 용기에 담겨져 벤취위에 가지런히 놓여져있는 경우도 많다. 워낙 많은 음식들이 놓여 있어 머리를 부딪혀가며 다툴 필요도 없다.
오징어, 떡볶이. 오뎅을 비롯한 간식류와 치즈샌드, 햄버거, 고구마깡, 감자스틱에 양념치킨까지 그야말로 비둘기들의 먹거리 큰 잔치가 판을 벌린 것이다.
사실 비둘기들이 오랜 세월 즐겨온 부동의 넘버원 먹거리는 새우깡이다.
실제 새우깡 한봉지에 새우는 극소량만이 가루가 되어 밀가루와 합쳐져 있지만 한조각을 입에 물고 와삭 소리를 내며 잘게 분쇄를 하는 순간 고소한 새우냄새가 물씬 풍겨나온다. 어른 아이 너나 할거 없이 즐겼던 새우깡을 우리나라 최초의 스낵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흔하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비둘기들의 대표간식이자 특별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둘녀 A와 B는 버스킹이 열리던 날 일찌감치 공원으로 나와 벤취주변 좋은 곳을 찾아 어슬렁 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는데 옆자리 벤취에 다정하게 앉은 노부부가 새우깡 봉지를 뜯고서 손도 몇번 가지 않은 듯 속이 꽉찬 봉지를 흔들면서
" 할애비는 이빨이 아파 더 못먹겠다. 옛따. 니들이나 먹어라. "
비둘녀 A와 B앞으로 새우깡봉지를 던졌다. 그날 밤 그녀들은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노부부가 건네준 봉지안에는 새우깡이 쌔 거나 다름없는 양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있어 비둘녀 일생 최고의 횡재수를 당했으니 쉽사리 잠이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우깡 한 봉지면 비둘녀 A와 B 두 일가족의 일년치 식량에 버금가는 양이다. 육교밑에 거주하는 비둘기들이 일년내내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뛰어다녀봐도 결코 얻을수 없다.
가히 비둘기세계의 로또당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의 주역이 된 그녀들은 우쭐한 기분에 평소와 달리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선행에 선뜻 나섰던건데 비둘녀 L이 싸늘한 반응을 보이자 기가 막히다며 부리로 땅을 마구 쪼고나서 가져갔던 새우깡조각을 그대로 물고 돌아갔다.
모임대표인 비둘녀 C의 구역을 가리지않는 남다른 열성에 힘입어 육교아래 비둘녀들의 모임이 ○○역먹거리골목에 거주하는 비둘녀들의 모임을 망라해 영향력이 가장 크다. 비둘녀 A와 B 그리고 L도 그런 이유로 모임에 발을 들이게 된것인데 간혹 가다 비둘녀들의 피앙새인 수컷들도 업저버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돌씽 비둘녀 L은 그런 날은 더더욱 모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혼자라 이방인으로 보는 시선도 싫었고 흥청망청 암수가 어울려 뒤엉키는 분위기도 싫어서 참석안하는거라는 뒷담화가 알려지면서
비들녀 L 그녀는 저만 잘났나 식의 온갖 비난과 따돌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수다스런 부리놀림으로 유명한 비둘녀 A와 B가 요리하기 좋은 먹잇감을 비둘녀L 스스로가 자초했던 것이다.
특히 비둘녀 B의 수컷은 암컷편력이 심해 비둘녀 L에게까지 부리를 디밀며 접근을 시도해씨다가 비둘녀 B에게 들켜서 심하게 머리를 뜯기는 등의 구설수에 오르내린 사건도 있었던 터라 설사 비둘녀 L과는 무관한 일이라해도 비둘녀 L을 향한 비둘녀 B의 불타는 악감정은 주위를 불편하게 했다.
비둘녀 L은 아주 오래전 수컷과 둥지를 달리하며 홀로 새끼를 키우며 살아 외롭고 힘겨운 생활을 해왔다.
수컷남들의 시도때도 없는 접근과 그들의 암컷들이 가하는 모욕과 비난도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또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병약해진 어린 새끼를 온전히 키우고 먹여살리는 일도 가녀린 암컷 비둘녀 혼자몸으로는 감당하기 쉽지않은 일이었 다.
최근 이웃나라에서 날아온 미확인 조류가 퍼뜨린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육교아래 비둘기들의 세상에도 비상이 걸렸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자 서둘러 안전대책기구가 만들어졌고 노약자나 어린 비둘기들의 안전과 예방을 위한 대책들이 전 비둘기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건강한 날개짓을 위한 비행은 물론 먹거리를 구하기 위한 필수 외부활동에까지 극심한 통제가 이루어지면서 먹거리를 구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고
절대로 땅바닥에 떨어진 건 먹지도 먹이지도 않는다는 비둘녀 L의 고고한 자존심도 서서히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까치들의 습격으로 둥지마저 잃게되자 남몰래 비둘남 K를 찾아가 은밀히 불러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와 자신의 새끼가 살 안전한 곳을 찾아 둥지를 틀려고 준비중었는데 혼자 힘으론 어려우니 둥지 만드는 일을 대신 좀 해달라는 취지였다.
비둘녀 L과 비둘남 K는 둥지가 가까워 거의 매일 자연스럽게 마주 보며 지나쳤지만 특별한 몸짓이나 인사도 나누지않고
그저 경계심만 품지않고 데먼데먼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물론 비둘남 K가 육교아래뿐 아니라 전철역에서 ○○여대 정문까지 이어진 골목길에 거주하는 모든 비둘기들로부터 전설이라 불리우는 전력을 가진 유명한 비둘기였음을 비둘녀 L 그녀도 모르진않지만 그녀는 그동안 비둘남 K의 전설엔 전혀 관심도 갖질 않았었다.
비둘남 K는 비둘기들의 집단 둥지터에서 조금 떨어진 높다란 교회 종탑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홀로 산다.
아득한 세월 까치나 직박구리를 비롯한 불법무도한 외부의 침입에 맞서 선봉이 되어 싸우던 파수꾼으로만 오래 살다보니 비둘기사회의 평범한 일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무리로부터 떨어진 곳에
둥지를 틀고 산다.
평범하지않은 삶을 살아온 비둘남 K는 파수꾼의 자리를 그만둔 이후에도 비둘기들의 세상속으로 들어가 어우러지려 하지 않고 구름을 쫒는 무모한 비행만 즐겨왔다.
" 저기요. 비둘남 K님. 이따가 혹시 시간있으세요. 할 얘기가 있는데."
느닷없이 다가와 불쑥 꺼낸 말이 너무 황당하고 뜻밖이라 비둘남 K는 아무말없이 바라보기만하자
" 약국옆 ○●○커피숖앞에서 기다릴께요. 이따 뵈요."
미처 못 다 삼킨 빵조각을 부리로 물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비둘녀 L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비둘녀 L을 만나기 직전에 점찍어둔 ○○바게트앞으로 잽싸게 날아가 계단턱에 떨어진 제법 커다란 빵조각을 부리로 물고 자신의 둥지인 교회종탑으로 날아갔다.
○●○커피숖앞은 점심식사를 마친 젊은이들이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비둘남 K는 비둘녀 L의 얼굴을 쳐다보며 굵고 깊은 상처가 눈에 띄는 부리로 방향을 가리키고 이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창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특별한 이유없이 커피를 마시지않는 비둘남은 뭘 마실래요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비둘녀 L을 바라보며
그냥 난 괜찮으니까 할 얘기나 하시죠.
비둘녀 L은 다소곳히 머리를 수그리며
비둘남 K에게 다가서서 약간은 흔들리는 작은 소리로 도움이 절실한 이유를 설명했다.
새로운 둥지를 발견하고 수리를 하려하는 데 갑자기 나타난 비둘남X 때문에 무섭고 힘들다. 집수리를 도와주겠다면서 거칠게 대하고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는데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어서 고민고민하다 비둘남 K님 한테 부탁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비둘녀 L에겐 체격좋은 남동생도 있다고 했고 오래전부터 이웃에 살며 허물없이 지내는 비둘남 W도 있는데 ......
비둘남 K는 그 말을 입속에만 담고 의문이 가는 이유를 소리내어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런 비둘남K의 표정을 읽었는지 비둘녀 L은
" 제 남동생 비둘남은 아직 어리고 비둘남 W는 너무 점잖고 유해서 도저히 해결해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비둘남X 에게도 벌써 말했어요. 남편비둘남 K가 곧 올거니까 할 얘기있으면 남편한테 말하라고요. "
" 도와주실거죠?"
몇일 후 비둘남X를 만난 자리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비둘기가 우리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비둘녀 L,
다소 어색해하며 연신 고개를 젖는 비둘남K의 목과 부리를 자신의 부리로 부벼대며 빨리 거들라고 은근히 재촉을 해댔다.
'기왕에 도움을 주겠다고 한 일이니 어째든 문제를 해결하고보자. OK. '
무수히 많은 전장을 누비며 실전을 경험한 비둘남 K의 멘탈은 아주 불리한 상황이 아니면 여간해서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비둘남 X의 질이 좋지않은 포스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두터운 부리와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 나 없을때 우리 ◑◐이엄마한테 많은 도움을 줘서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느라 무심했는데 이제 제대로 남편노릇 좀 해야겠습니다. "
세상물정에 빠꼼해보이는 비둘남 X는 빙긋이 웃다가 언제 소주나 한잔 합시다
거칠게 한마디를 남기더니 비둘남 K의 몸에 자신의 육중한 몸을 슬쩍 부딪치고 둥지를 떠났다.
그일이 있고나서 비둘녀 L과 비둘남 K는 부쩍 가까워졌고 주위를 의식해 남모르는 시간에 따로만나 둘만의 은밀한 비행을 즐기곤했다. 비둘남 K는 혼자의 비행에 익숙했었는데 둘이서 비행을 하려니까 어쩐지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가도 암컷비둘기 L만이 가진 묘한 날개짓에 자꾸만 이끌려 부질없는 비행(?)에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비둘녀 L과의 사이가 조긍씩 가까워졌음을 느낄수록 어딘가 공허함이 떠밀려와 마치 구름위에 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비둘남 K는 더 가까이는 다가가지않은 채 한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구헌날 이리저리 날아만 다녔다.
오늘은 반드시 말해야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꽤 긴 시간을 날아 멀리 △△산을 갔다가 돌아와 익숙한 ○○역 먹거리 골목입구에 착륙해 비둘녀 L 그녀의 둥지가 있는 길로 막 들어서려는데 비둘남 W와 비둘녀 L 그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비둘남 K의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아무리 BQ가 떨어지는 새라지만 ......
비둘남 K는 어차피 확실하게 선을 그으려고 비둘녀 L 그녈 찾아온 거였으니
' 이젠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어졌고 차라리 잘된 일, 행여 미련일랑 조금도갖지말자'
힘찬 소리를 내며 솓아올라 멀리서도 눈에 띄는 빨간지붕이 예쁜 교회의 종탑위를 향해 날아갔다.
비둘녀 L을 만나면 섣부른 비행은 여기서 그만두자고 말해주려던 거였다. 그런데 만남자체가 의미없어졌으니 비둘기 K의 모습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둥지를 정리한 비둘남 K는 진작부터 마음먹었던 ○●강으로의 먼 飛行을 위해
해거름이 넘어가는 육교위 너머로 방향을 틀고 천천히날개를 폈다. 바람에 K의 날개가 너울 너울 춤을 추듯 드날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