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hard rock을 좋아했다

2. 꼰대 김지영 DJ 김지영

by 김운용


호와 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는데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 둘도 없는 절친이다.


나하고 태호는 용돈만 생기면 모아뒀다가 둘이 합쳐서 두어 달에 한 번씩 월간 팝송을 샀다. 용돈을 아껴서 쓰기도 하고 신문배달 우유배달도 둘이서 번갈아가며 한 달간 씩 했었다.


호와 난 그렇게 어렵게 모아 온 월간 팝송책들을 다 넘겨가며 CCR 노래만을 찼았다. CCR은 있는데 가사가 없다.


겪어보니 김지영 선생 좋은 분이긴 한데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도록 가사 외우기는커녕 구경도 못했으니 고민이다.




약속 못 지켰다고 보류했던 체벌을 다시 할 옹졸한 분 같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약속도 지키고 싶다.


마땅한 방법은 없고 공부도 안되니 그냥 내 방에서 뒹글 거리며 죽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나가 문을 열더니 너 공부 안 하고 뭐하냐. 고등학교 들어가면 공부 열심히 한더니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빈등 거리는데 소리를 지른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누나는 착해서 잔소리가 짧다. 한번 말하고는 더 이상 말 안 한다. 그런데 드르륵 누나가 방문을 닫자마자 갑자기 기발한 방법이 생각났다.


누나!

누나가 필요하다. 누나의 국민학교 동창이 음악다방 DJ라고 했지.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누나가 이번일 도와주면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할래 약속을 강요하길래 굳이 공부와 CCR노래 찾기를 연결하려는 조건 자체가 부당하다 싶었지만 일단은 급하니 어쩔 수 없이 오케이 해버렸다.


" 언제까지야? 이번 주 토요일까지 해주면 되지? "


" 안돼! 내일 수학 시간에 발표해야 돼. "


그런 걸 왜 지금 말하니 누나가 평소와 다르게 같은 주제로 두 번 잔소리를 한다.

저녁에 퇴근할 때 만나서 알아볼게 라며 돌아서는 누나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다.




학교에 가니 태호가 너 숙제 다했냐며 걱정 어린 눈길로 묻는다. 누나가 도와주기로 했다니까 태호 녀석 드럼 치듯이 책상을 두둘 기며 기뻐한다.


이따 점심시간에 매점 가자며 태호가 내 등을 찌르며 윙크를 한다. 태호는 참 좋은 친구다.

숙제를 해결한 내게 매점에 가서 고마움의 표시를 하겠다는 영원한 우정의 친구다.

돌아서서 태호를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매점 앞에서 김지영 꼰대 아니 선생님을 만났다. 워낙 강렬한 인상이라 다른 데는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약간 다리를 저는 것 같아 보인다.


니들 빵 먹으러 왔지? 한 개씩만 골라.

단팥빵 한 개랑 우유 한 개씩 사주시고는 교무실을 향해 걷는 선생님의 뒷모습이 왠지 불쌍해 보였다.




퇴근해온 누나가 대학생들이 쓰는 필기노트로 된 종이쪽지를 건네준다. 준식이 형이 필요하면 토요일 놀러 와서 기타 치며 노래를 가르쳐주겠다 고 했단다.


준식이 형이 대학생이라 가사 전체를 영어로 적어 보냈다.

사전 찾아가면서 발음 나는 데로 한 단어씩 한글로 옮겨 적었다. 태호 꺼 까지 두장을 썼다.

who will stop the rain을

후 윌 스톱 더 레인으로.


저녁밥을 먹고 나니 태호가 찾아왔다. 노래 가사를 시 외우는 것처럼 멜로디 없이 외우려니 어색하고 쉽게 외워지지 않았지만 우린 밤늦도록 CCR을 외쳐댔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 큰소리를 지르며 외웠더니 목이 잠겼다.

아침 먹어라 엄마가 부르는데도 목소리가 잠겨 대답도 잘 안 나온다. 엄마가 컵에다 달걀노른자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후 휘휘 저어서 갖다 주셨다. 단숨에 들이마셨다.


엄마표 달걀 주스 덕분인지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목이 조금 풀렸다. 다행이다.




수학 시간은 5교시다. 태호와 점심 먹고 나서

우린 마지막으로 후위 일 스톱 더 레인을 소리쳐 외웠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김지영 선생님이 들어온다. 근데 웬일로 오늘은 양복을 입고 왔다. 양복 입은 걸 첨 본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선지 잘 어울린다.


수업이 시작됐는데 숙제 검사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5분 남았다. 혹 선생님이 기억 못 하시나 밤늦도록 목이 쉬어라 외웠는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우리를 쳐다보시며 지난주에 숙제 내준 거 다했냐고 묻더니 종례 끝나고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다.


의아했지만 태호와 난 수업 다 끝나고 교무실로 갔다. 영어를 가르치는 우리 학교 최고의 미인 윤홍자 선생님이 첫눈에 들어온다.


나만 보면 웃으시는 예쁜 윤홍자 선생님 자리가 김지영 선생님 바로 앞자리다. 교무실에서 숙제 검사를 하려는가 싶어 약간은 긴장했는데 윤홍자 선생님이 웃으며 앞에 계시니 더 떨렸다.




니들 오늘 선생님일 좀 도와라며 김지영 선생님은 숙제 검사완 전혀 다른 업종의 일을 시키신다. 침좀 자기 집으로 옮겨달라는 것이다.


긴장은 했지만 나의 사랑 영어 담당 윤홍자 선생님 앞에서 실력을 뽐내볼까 했는데 김지영 이 꼰대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 김지영 선생님 몸도 불편하신데 너희들이 잘 도와드려."

꾀꼬리 같은 우리 윤홍자 선생님의 목소리다.

호 녀석이 윤홍자 선생님을 향해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구십도 각도로 인사를 한다.


언제 봐도 태호는 신속 경쾌하다. 특히 여자 앞에선 더하다. 난 좋아하면 조금은 망설이는 성격이라 늘 태호보다 한 발짝 늦다. 남자들 앞에선 내가 훨씬 빠르고 용감한데 이상하게 잘 안된다.




김지영 선생님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진 않지만 옥천동 경사진 언덕길을 100m쯤 올라가야 해서 짐을 양손에 들고 가긴 꽤나 힘이 든다.


선생님은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제자들 데리고 왔다며

밥 좀 더 차려 달라 신다.


와. 하숙집 반찬이 다양하다. 우리 집에선 흔하게 먹지 않던 소고기 장조림도 보이고 내가 먼 훗날까지도 그리워하던 빨간 소시지까지 눈에 확 들어온다.


밥상을 마루에 내다 놓고는 전축을 튼다. 누나가 사 온 야외전축만 보다 쿵쿵 방구들까지 울리는 전축을 보유한 선생님의 스테레오 전축을 보니 너무 부럽다.


CCR이다.


" CCR이 뭔지 알아왔냐? "

" 예 "

그간 월간팝송책에서 찾아본 기억을 살려 설명을 해드렸다.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물을 재생시킨다는 뜻이며 1959년 만들어졌고 미국남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서던 락그룹이다. 멤버는 존 포거티 등 4명이며 히트곡은 Have you ever seen in the rain, proud mary, cotton fields 등이 있다 등.




설명을 들으시더니 고생했다며 지금부터 이 노래 잘 들어봐라 하더니 바늘을 턴테이블 위로 옮겨놓는다.


숙제로 내줬던 그 노래다. 곡조가 경쾌해서 절로 고개를 흔들고 발가락이 움직여진다.

특별한 설명도 없다.


곡이 끝나자 톤암을 제자리에 옮겨놓고 전축을 끄고는 뜬금없이 너희들 누나 있냐 물으신다. 태호가 이번에도 저는 있고요 얘도 있습니다 내대신 이번에도 빠르게 대답한다.


그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너희 누나 이쁘냐 한다. 예. 이쁩니다 대답은 했는데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러더니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서

선생님은 625 전쟁 때 태어났는데 피난 내려오다 고아가 되어 고등학교까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다쳐 다리가 약간 불편하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학을 가게 됐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우리 학교로 왔다고 한다. 김지영 선생님의 담임선생님이 지금 우리 학교 교감선생님이시란다.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같이 생각하는 고마운 분이시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하신다.


낮에 매점에서 빵을 사주고 돌아서가는 뒷모습이 왠지 우울해 보였던 이유가 있었구나 이해가 되었다.


통금시간 다 됐다. 늦었다. 이제 집에 들가라. 수고했다. 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