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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Mar 28. 2022

오직, 온 세상인 사랑

영화 <블라인드>


15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잔혹동화 같은 처절한 비극의 사랑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미장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감각을 깨우는 작은 소리들. 보이지 않는 당신이 그녀를 보기 위해 건네는 손길은 다른 이들의 손짓보다 얼마나 더 애타고 간절할까. 그 사랑을 보면서 잠시 나도 나를 보는 사람이 아닌,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무언가 하나가 빠졌다는 것을 깨달아 한 걸음 물러섰다. 평범하지 않아 특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상처를 존재 그대로 안아주는 세상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세상을 향한 사랑은 구분되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삶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그 모든 사랑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타인을 사랑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 정말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조언하는 무수히 많은 철학이 살짝만 들춰봐도 사방에 있다. 그렇기에 타인만을 사랑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행동, 특성이나 소유에 대한 사랑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미소, 목소리, 손과 눈을 사랑한다면 그의 특성들이 사랑의 이유이며, 이유 없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구현된 사물을 사랑하듯 상대를 애정하는 것이다.


시력을 읽은 루벤(요런 셀데슬라흐츠)은 자신을 알지 못했던 세상으로 이끄는 그녀의 냉정한 온기에 매료되어 간다. 아마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환영이 그에게 사랑의 이유였을 거다. 마리(핼리너 레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세상과 나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거울 속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타인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루벤에 사랑을 느낀다. 겉모습을 제외한 그녀의 존재를 이루는 나머지 모든 것을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하지만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면서도 그녀는 자신에 대해 하나같이 거짓으로 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벤이 마리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볼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실체 없는 사랑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둘 사이를 메우는 세상이 애초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이것이 사랑일까? 분명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로 손꼽았던 영화였는데 그럴 리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활자를 꼬박꼬박 따라가며 남긴 발자국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손끝에서 난 아름다웠어


마리는 루벤을 속여 자신의 환영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사랑한 사람의 진심이 왜곡되게 느껴질 법한데도 루벤은 그녀를 진실로 마주했을 때조차 사랑을 속삭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당신은 나의 사람이고, 나와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리는 동화를 믿지 않는다 했지만, 그것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사랑은 애초에 동화 같은 힘을 가진, 보이지 않지만 손에 닿는 따스함이다. 애초부터 표면의 거짓들로 뒤덮인 존재라도 그녀를 손끝으로 알았던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그 내면의 상처받은 영혼을 자신의 영혼과 묶어두었고, 이미 그가 그녀 그 자체이고 사랑이 세상 전부였기 때문에. 마리와 루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불완전 했지만, 루벤의 사랑만큼은 눈의 결정체처럼 투명하고 애처롭게 빛나고 있었다.


<눈의 여왕>의 결말처럼 ‘영원’이라는 단어를 완성하기 위해 결국 그는 그녀의 편지가 제시한 영원한 사랑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진실한 사랑은 눈을 멀게 하지
그 사랑은 영원해


그녀가 없는 세상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녀가 읽어주던 책의 구절들이 만들어낸 환상을 더 사랑하고, 보이지 않아서 아름다운 순간들을 더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새삼 그가 영원히 담고자 했던 마음이 오히려 잃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그 용기의 깊이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끝없이 펼쳐진 눈밭처럼 차곡히 쌓인 먹먹한 풍경이 된다. 그럼에도 그는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하얗게 웃고 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둠에 익숙했던 내가 밝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읽고 싶은 마음에 손을 맞대고

향을 맡다 이내 입을 맞추어 본다는 것은

아마도 환상을 봉쇄하고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가고 싶다는

읽히지 않는 언어


그 외마디 희망이 밝은 시야에 가려지면

매일 얹어지는 시간의 무게에 나날이 시들어간다


하지만 보이지 것들,

손에 닿지 않거나

들리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들은

스쳐 지나지 않고 항상 지척에서 맴돌고 있다

부재가 존재를 더 부각시키고, 시간을 붙잡는다

애처롭게도 더 많은 것이 존재하는 순간은

존재를 완전히 경험할 수 없을 때다

이때 우리는 몇 걸음 더 가까이 영원에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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