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N
N, 내 삶에 가장 깊은 자욱을 남기고 간 너를 데이팅 앱에서 만났다는 게 참 우습지. 가식을 다 집어 던지고 욕망에 충실한 사람과 그 안에서도 평생의 사랑을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는,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재단하는 그곳에서 말이야.
몸서리치게 외로워질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커다란 공허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 같을 때. 포근한 이불이 내 온몸을 감싸고 있는데도 이불의 온기는 내게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린다. 어느 날은 그 결핍을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서 데이팅 앱을 켰다. 별 의미 없는 대화라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대면하지 않고도 누군가의 얼굴과 취향으로 삶의 배경을 추측할 수 있으니 이렇게 안온하고 관음적인 만남이 또 있을까. 막상 모르는 사람과 정말로 대화를 나눌 용기가 없어 한참을 구경만 하고 있을 즈음에, N이 나타났다.
동갑. 어색한 셀카. 성인이 된 후의 삶을 타국에서 보낸 사람. 한국어로 적은 조금 어색한 자기 소개로 나는 N의 배경을 짐작했고 이내 궁금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N이 메시지를 보냈고 우린 대화를 시작했다.
뜻밖의 계기로 누군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런데 서로에게서 믿을 수 없이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건 우연을 가장한 인연일 거라고 믿어버리기 마련이다. 시작하는 연인들에게서 흔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N이 내게 처음으로 알려준 노래는 내가 스페인어를 배운지 얼마 안 됐을 때 자주 들었던 노래였고 내가 처음 접했던 남미문학의 작가는 그 사람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정도로 N이 좋아하는 작가였다. 내가 종종 갔던 바를 N 역시 자주 다녔고 서로를 알기 전부터 우리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어떤 기대감에 우릴 도취시켰다.
N과 나는 서로의 모국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그런 대화는 이전에도 아주 많이 있었지만 N과의 대화는 조금 달랐다. 농담과 진심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도 충분했다. 당신과 내가 같은 마음일 거라는 믿음, 대화가 주는 즐거움과 설렘에 이따금 볼이 발갛게 상기됐다.
처음으로 전화를 한 날, 전화를 끊고 나니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 통화를 했는데 매번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끊기 전엔 아쉬움을 잔뜩 남긴 채 내일을 기약하며 현실에 겨우 발을 붙였다.
“동물들은 시간 개념이 없대. 무언가 시작되고 끝이 나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하지 못한대. 그러니까 그들에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거야. 이게 보르헤스가 정의하는 영원이야.”
“그렇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게 영원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 오직 그 사람과 나만 존재하는 그 찰나의 시간, 그걸 영원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영원 같은 거 믿지 않는데, N과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추위를 핑계로 N에게 안겨있을 때, N이 고개를 살짝씩 돌려가며 내 눈을 번갈아 바라볼 때, 내가 나여서 보지 못하는 반짝이는 무언갈 발견하고 N의 언어로 내게 건넸을 때. 그 애 말대로라면 나는 몇 번이고 영원을 살았다.
N과 있으면 모든 게 명확했다. 감정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저절로 알았다. 떠오르는 말을, 내가 느낀 것을 말하면 나는 의도하지 않아도 로맨티스트가 됐다. 사랑을 찬미하고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오로지 진심일 수 있고 한치의 의심도 없는 마음. 그게 N에 대한 마음이었다.
기대는 번번이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나는 또 희망을 걸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내 삶에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경험에 기반한 이 확신은 미래의 나를 배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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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의견인데도 고집을 부리며 나를 설득하려던 누군가에 대해 얘기했다. 그 사람과 나는 겹쳐질 수 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고, 우린 다른 차원에 있어서 이해조차 불가능한 관계였다고 얘기했다. N은 그걸 듣고선 이렇게 말했다.
“평행선을 달린다면 절대 가까워질 순 없겠지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교차할 수 있다면 만날 순 있겠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그 둘은 계속해서 멀어지게 될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N과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말이었다고 지금 생각한다.
교차점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운명이라 여겼던 내 생각을 비웃듯이 우연은 빠르게 빛을 잃었다. 내가 저 위로 달려가는 사이 N은 아래로 침잠하고 있었다. 오해는 발에 채이는 낙엽처럼 흔했고 이해는 금세 아득해졌다. 모든 걸 터놓고 얘기하던 우리는 어느새 말을 아꼈다. 운명 같던 예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E의 말처럼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날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괜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의미 없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달라진 그 애의 행동, 말투 하나하나에 휘둘리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나는 N과의 연락을 그만뒀다.
그 뒤로 N이 내게 남기고 간 것들을 생각했다. 그 애가 내게 알려준 노래를 들을 때, 정처 없이 걷다가 도착한 곳이 그 애랑 같이 걷던 공원이었을 때, N이 내게 해준 말을 적은 일기장을 다시 읽을 때, 우리가 그렇게 바랐던 더운 계절이 왔는데도 내 곁엔 빈 자리만 느껴질 때. 그럴 때마다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재생하듯이 나는 그 애와의 대화를 복기하고, N이 내게 해줬던 말들을 적은 일기장을 읽고 또 읽었다. 하루하루는 그저 견뎌내는 것이었고, 기억 속 과거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살아날 수 있었다.
모든 미련은 전하지 못한 말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서점의 한 켠에 유독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는 이유를, 랜덤 플레이리스트에서 흘러나온 한 곡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설명할 수 있는데. 복숭아처럼 솜털이 난 그 애의 귀와 나무와 대화했을 꼬마시절의 너, 분홍색의 커다란 후드와 자랑스레 보여주던 스폰지 밥 양말도 여전히 선명하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너에 대해 쓴다면 멈추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그 말을 들어줄 청자는 사라졌고, 그것이 가장 슬펐다.
나는 아마 그 애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N과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다고 해도,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된다고 해도. 기억은 세월에 깎이고 부서지겠지만 사라지진 않으니까. 너무 가벼워져서 미처 생각도 못하다가 계절이 바뀌는 날, 오랜만에 집어넣은 코트 주머니에서 지난 해의 기억을 발견하는 것처럼. 예기치 못한 어느 날에 나는 한겨울의 그 애를 마주할 테니까.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건 평생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테다. 다만 그것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 그뿐이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서 나는 너의 연인이고, 친구고, 적이고, 너와 아주 무관한 사람일 거야. 추이펀의 작품에서는 모든 결말들이 일어나고 미로처럼 얽힌 그 수많은 미래들은 언젠가 하나로 다시 만나겠지만, 우리는 추이펀의 미로 속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시간 앞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릴 수밖에 없잖아. 내게 주어진 결말은 어떤 걸까. 너는 어떤 미래에 도착해 있을까.
끝나지 않을 추이펀의 미로 속에서 나는 기꺼이 길을 잃어.
모든 경우의 수를 가늠하고 우리 앞에 놓일 모든 결말들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