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 to Z

평행우주

아홉 번째, I

by 연Yeon

I님에게


저 최근에 영화를 봤어요. 너무 좋아서 두 번째로 본 영화였거든요.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런 영화였어요. 거기다 마무리도 좋았어요. 눈가가 촉촉해지는 감동도 있었고요. 그런데 두 번째 볼 때는 그냥 그랬어요. 예상되는 전개가 이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보면 볼수록 좋은 영화들 많잖아요. 그런 걸 기대했는데.


I님. 문을 닫기 전에 제가 꼭 다시 찾아간다고 했었잖아요. 문을 닫는 날이 마침 제 생일 근처였으니까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놀러 가겠다고요. 이 말을 기억하고 계셨을까요. 그곳은 많은 이들이 드나들었고 마음을 두고 간 사람들도 많으니 잊어버리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가지 못했으니까.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찌어찌 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요,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곳에서 보냈던 충만한 시간을요.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좋았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사람, 다시는 찾아가지 않는 사람. 저는 대체로 전자의 사람이었어요. 전 애인과 만났던 공원을 다시 찾아가고, 함께 지났던 길을 산책하고, 같은 식당에서 같은 음식을 시켜 먹었어요. 너무 좋았으니까 다시 그곳들을 지나고 싶었는데 슬프더라고요. 더 외롭고. 런던 버로우 마켓에서 먹었던 끝내주게 맛있는 블랙커런트 클로티드크림 맛 아이스크림 집을 다시 찾아갔을 때도 그랬어요. 그때와는 다른 평범한 맛에 실망했거든요.


그렇게 처음만큼의 감각은 다시는 느낄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이해하고 믿게 되었어요. 그런 건 왜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될까요. 언제부턴가는 전자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좋은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좋았던 기억이 실망감으로 얼룩지는 것만 같아서요. 그래서 I님을 다시 찾아가는 것 역시 조금 겁이 났어요. 올 한 해를 돌아봤을 때 단연 손에 꼽는 시간이었거든요.


아무도 없는 서점을 홀로 독차지한다는 것.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공간을 맡기는 마음. 어릴 적 꿈꾸던 다락방의 모습. 밤까지 이어졌던 인터뷰를 빙자한 대화. 수년의 텀을 두고 겹쳐진 장소들, 그리고 아르헨티나. 고요한 새벽 쏟아지던 빗소리를 들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순간. 아침 산책에서 발견한 이파리 위의 물방울들. 흐렸던 하늘이 잠깐 사이에 밝아지며 물방울에 담겼던 빛. 일요일 아침 아무도 없는 성당.


시간을 절박하게 붙잡고 싶었던 것이 얼마만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끝이 있다는 게 저를 그렇게 백 프로의 마음으로 살게 했을까요. 그래서 그리도 진하게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I님. 저는 그때 죽음을 자주 입에 올렸었죠. 그때 그러셨잖아요.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퇴보와 진보를 반복하지만 결국엔 세상은 좋아져요. 쿵쾅쿵쾅 해서 그렇지.


죽지 마세요.


나이 든 지금이 가장 좋아요.

라고.


저 나이 든 제 모습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어요. 미래가 기대되는 순간도 없었고요. 그때까지 살아있을 거라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들이 인턴이니 대외활동이니 먹고 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저는 제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며 살았어요. 아주 최소한의 책임감만을 가지고. 그래도 용서되는 나이였으니까요.


그렇게 계속 유예했던 것 같아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계속 기댄 채로. 그게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살리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할 때까지 외면하면서요. 그래서 불안했어요. 즐겁지만 무서웠어요. 끝이 오기 전에 모든 게 끝나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렇게 삶을 오래전에 포기한 사람처럼 살고 있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무지의 미래 대신 그리운 기억을 안고 사라지는 것이 더 안전할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끔찍한 일들은 없었으니까. 꽤나 평탄히 살아왔으니까. 벌 받을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언제 찾아올지 모를 최악의 상황 앞에 벌벌 떠느니 차라리.


그곳에 다녀간 지 반년도 넘게 지났어요. 그리고 이제는 I님의 말을 조금은 이해해요. 난생처음으로 나이 드는 게 좋다는 말을 입 밖에 꺼냈어요.


저 이제 전만큼 삶에 회의적이지 않아요. 나를 책임지는 삶을 마주하고 있어요. 그게 가끔 고되지만 좋아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어요. 그것이 저를 움직이는 삶을 살아요.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에서도 벗어나고 있어요. 우울감 없이 지내는 것이 낯설어요.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가 다시 봤던 영화는 선택마다 갈라지는 수많은 평행우주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가장 최악의 경우의 수를 골라왔던 주인공이 다른 평행우주의 자신들을 만나요. 주인공은 잠시 그 삶에 혹하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내 그 최악의 선택들 덕에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요.


그 어떤 선택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욕심 많은 마음. 그게 저를 항상 망쳐왔다고 생각했어요. 놓쳐버린 선택지를 돌아보고, 내 앞에 주어진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날도 비슷했어요. 갈까, 기억 속의 장소로 남겨둘까. 그건 선택이라기보단 주저하는 마음으로 때를 놓쳐버린 것이었으니까요.


최악의 선택들이 결국 주인공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었듯 주저하는 마음들이 쌓이다 보면 저에게도 의심 없이 하나의 선택지만을 고를 수 있는 확신이 생길 날이 오겠죠. 미래를 실망의 가능성보다 새로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날 역시 오겠죠.


I님을 찾아갔을 저의 또 다른 평행우주에선 어땠을까요. 그때만큼은 닿지 못할 충만함에 조금 슬퍼했을까요. 혹은 이곳의 나를 안타까워할 정도로 멋진 시간을 보냈을까요. 저는 영영 모를 결말을 위해 언젠가 I님을 만나러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제가 놓쳐버린 선택지가 이끌어줄 또 다른 결말로요.


건강하세요. 다시 만날 그날까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