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른, 예술과 만화의 경계 <안나라수마나라>

뛰어난 기술, 절제의 아름다움

by 박소연

〈안나라수마나라〉 아이와 어른, 예술과 만화의 경계를 허물다


아이는 언제 어른이 된 것을 알게 될까? 공식적으로 스무 살이 된 청년들이 5월에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지만, 사실 중년이라는 나이가 창피한 어른도 있고, 애늙은이 같은 초등학생도 있다. 아이였을 때 생각했던 어른은 막상 되고 보니 다르다.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른이라 티를 낼 수는 없으니 더 치졸하고 유치하다. 대화가 정치나 승진 같은 그럴듯한 주제로 바뀌었을 뿐, 아이였을 때 학교 숙제에 쫓기던 것처럼 사회의 책임에 쫓기고, 과자 대신 술로 마음을 달래며 어른인 척 현실을 감당할 뿐이다. 차라리 아이였을 때가 낫다고 생각하는 어른도 있지만, 떠올려보면 아이였을 때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어떤 아이들에게 현실은 어른이 겪는 만큼 고단하다.


아이와 어른, 한 끗 차이


〈안나라수마나라〉의 윤아이는 고등학생이다. 장난감 공장을 하던 아빠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닌다. 엄마는 집을 나갔다. 동생 유이도 빨리 어른이 되어 언니의 짐을 덜어주고 싶은 듯하다. 구멍이 숭숭 난 스타킹을 신고 학교에 다녀 창피하지만 쌀을 살 돈도 없다. 알바를 하면서도 아이는 언제나 전교 1등 나일등이 견제할 만큼 성적이 좋다. 아이는 빨리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다.


새로 구한 알바에서 받은 돈으로 숨통이 조금 트이나 싶다. 만 원을 들고 스타킹과 쌀 중 어떤 것을 사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 바람에 만 원이 날아가고 아이는 지폐를 쫓아간다. 돈을 좇아 달리던 아이가 도착한 곳은 망해버린 유원지이다. 아이의 돈을 들고 있는 마술사가 묻는다. “당신은… 마술을 믿습니까?”


아이는 “아니.”라고 매몰차게 말한다. 마술사를 한심한 백수라고 생각하지만, 마술사는 불쑥 아이의 삶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이는 매번 어른다운 결정을 내리지만, 철없는 마술사도 버리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는 나일등의 ‘일부러 시험을 못 보면 돈을 주겠다’는 치졸한 제안을 받아들이며 마술사를 만나 마술을 배울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진정한 어른이란


작품은 시작하면서 ‘당신은 마술을 믿습니까?’라며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분명하게 설정한다. 마술을 믿으면 아이, 믿지 않으면 어른인 것이다. 〈안나라수마나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 위에 선 캐릭터들을 통해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빨리 자라야 하기 때문에 애써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마술을 믿지 않아’라고 말하던 아이는 마술사를 통해 꺼져가던 꿈을 되살린다. 마술사를 중심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데, 특히 아이가 어린 자신을 만나 희망을 주면서 스스로 위로받는 장면이나, 경찰에 연행되는 마술사가 사라지는 장면에서 이 경계가 무너지고 현실과 환상은 하나가 된다.


나일등이 이 경계를 넘는 것은 딱딱한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어른스러운 일등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 역시 좋은 직업을 가졌다. 똑똑해서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 그런데, 일등이 아이와 마술에 설레면서 이 경계 너머를 동경한다. 그는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벗어나 속도를 늦추고 따뜻한 꽃밭을 보고 싶다. 학교라는 굴레에 갇힌 학생이 학교의 창을 깨면서, 자신의 창을 깨고 안전한 선을 넘어버리는 것은 그동안 모든 것에 우선권을 가진 쉬운 길을 이탈하는 행동이다. 창을 부수고서야 일등이는 평범한 얼굴을 갖게 된다.


두 청소년이 자신의 세계를 넘고 확장하게 하는 마술사는 사회가 정한 어른이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사회에서 철없고 한심한 사람의 범주에 있는 마술사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들며 아이에게 소중한 꿈을 버리지 않게 하고 일등에게 따뜻함을 알려주는 ‘어른’이다. 그는 사회가 정한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어른이 아니어도 괜찮다며, 아이다움이 한 구석쯤은 남아있어도 괜찮다는 위안을 준다. 좋은 어른이란 한 가지 모습일 수 없고, 자신이 바라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싸울 것을 당부한다.


흑백 속 컬러, 현실의 대조


“당신… 마술을 믿습니까?”는 스토리에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역할이면서 독자들을 최면을 걸듯 어두운 갤러리로 인도하는 초대장이다. 흑백에 컬러를 선택적으로 적절하게 사용하고, 실사 이미지를 콜라주 하면서 꿈과 현실의 차이가 주는 느낌을 시각화했다. 때로 이 두 가지를 병합하거나 세로 스크롤과 결합하면서 스토리가 주는 힘을 확장해 전달한다.


흑백에 선택적으로 컬러를 사용하는 기법은 주제를 돋보이게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메멘토〉 등에 사용되기도 했다. 〈안나라수마나라〉에서는 생명력 없이 찍어내듯 어른을 양산하는 환경 속 캐릭터의 욕망을 시각화하고 심리를 극대화해 전달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9화 '묻는다'에서 마술을 배우면서 아이가 꿈과 소중한 감정을 다시 느끼는 장면에서 컬러는 놀라운 효과를 보인다. 흑백의 회전목마를 타듯 위아래로 움직이는 말과 아이의 독백을 스크롤 해 내리다가 그 끝에 펼쳐지는 푸른 밤하늘 구름 위의 풍경은 아이가 느끼는 해방감을 독자도 함께 느낄 수 있다.


TV 모니터와 아이의 독백이 결합한 장면은 글과 그림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함께 힘을 발휘한다. 아이는 동생이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안 가기로 했다는 말에, 나일등에게 돈을 받고 일부러 시험 문제를 틀리기로 한다. 아름다운 빛의 3 원색이 반짝이는 TV 모니터 위로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좋은 성적을 타협하는 아이의 독백이 겹쳐진다. 화려한 삶을 보여주는 TV 속 세상은 마젠타, 사이언, 옐로우의 밝고 아름다운 빛의 3 원색으로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표현되었다. TV는 빛을 전달하는 기술일 뿐이지만, 그 속의 화려한 삶과 이미지는 보는 이에게 박탈감을 주는 것처럼,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아이의 독백이 만나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캐릭터의 좌절감을 전달한다.


현실을 작품으로 초대하는 마법, 콜라주


〈안나라수마나라〉는 사진과 그림을 섞으며 콜라주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콜라주가 가장 많이 활용된 21화'네가 아는 어른'에서 어른의 정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나일등이 줄곧 되고자 했던, 모두가 부러워하고 존경하고 인정하는 어른의 이미지는 패션 잡지의 화려한 명품 브랜드 의류와 액세서리 등을 잘라 붙인 모습이다. 젊음과 성공의 상징인 빨간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앉은 나일등이 아스팔트를 달린다. 지나치던 잔상 속 따뜻한 꽃밭은 일등이 되려던 어른의 이미지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가로로 누운 캐릭터와 길게 난 아스팔트는 세로 스크롤을 만나 끝이 없는 외로움을 공유한다. 가로로 놓인 글자는 시각적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구체적 의미를 전달하며 나일등의 심리를 표현한다.


가장 돋보이는 이미지는 물론 만 원 지폐다. 만 원 지폐의 실물 이미지는 흑백 이미지 속에서 화려한 푸른색으로 도드라져 현실과 물질을 강조한다. 6화'눈 녹듯'에서 빚쟁이들에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지폐의 실물 이미지는 돈의 능력을 작품으로 초대해 아이의 저주를 풀어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지폐의 이미지는 돈으로 할 수 있는 현실의 가능성을 작품으로 불러와 착각을 일으키고 마술과 현실의 간극을 더욱 벌려놓는다.


그 외에도 아이가 쓰는 편지나 빚쟁이들에게 맞아 구겨진 종이가 된 마술사, 배고픈 아이에게 일등이 건네는 소시지 등 곳곳에 등장하는 현실의 이미지는 그림과 합쳐져 현실의 느낌을 만화로 가져오기도 하고, 만화를 현실로 확장하기도 하면서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세로 스크롤


〈안나라수마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눈송이가 아닌, 아이가 만 원을 쫓아가는 장면이다. 실물 이미지인 지폐 위를 숨이 차도록 달리며 가난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아이의 고단한 삶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세로 스크롤로 물리적인 프레임을 확장하면서 독자들이 그 프레임에 머무는 시간을 연장한다. 정지된 이미지를 스크롤하며 느껴지는 동적인 느낌은 물론이고 독자가 감정을 느낄 음미할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낸다.


명도와 채도를 높이거나 낮추는 프레임은 세로 스크롤과 만나,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사용하는 페이드 인·아웃의 효과도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움직임만 활용하지는 않는다. 햄버거집 사장에게 끌려가는 격렬한 상황 속에서 차분한 아이의 내레이션은 시간을 멈춘 듯 캐릭터의 심리에 집중하게 한다. 화려할 때와 침묵할 때, 멈출 때를 적절하게 선택해 캐릭터의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하고, 시각적 효과와 이미지는 스토리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보이는 이야기, 비주얼 스토리텔링


작가 하일권은 다양한 장르와 톤을 다루면서도 작품마다 뛰어난 연출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중에서 〈안나라수마나라〉는 글과 연속적 그림, 세로 스크롤 웹툰의 세 분야가 결합해 각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며 만화의 예술적 가치와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예술은 마음을 정화하고 현실의 고통을 견디게 해 준다. 윤아이가 가난의 저주에 걸려있듯 사람은 각자 다른 저주에 걸려있다. 저주를 풀어주는 마법은 없지만, 저주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예술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이 글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20 한국만화 웹툰 평론 공모전에서 기성부문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안나라수마나라〉는 스토리와 작품의 특성상 기획 단계부터 시각적 아름다움이 중요했던 작품이다. 작가의 뛰어난 기술과 표현력이 작품의 주제나 스토리를 압도하지 않아 좋았고, 오래 마음에 두었던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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