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이 가르쳐 주는 지혜

by Soyeon Kim


1년 전 산허리를 자르고 솟구치던 재건축 아파트는 마천루가 되어 멀리까지 콘크리트 냄새를 풍기고 작은 숲을 사이에 두고 그 무렵 터만 고르던 또 다른 재건축 아파트는 한결 위협적인 자태로 어깨를 견주고 있다. 이제 대모산은 그 사이로 정수리만 간신히 드러내고 있다.

한 해는 길었고 또 짧았다.


1.

말썽이 난 무릎 때문에 며칠 전 외출 길에 택시를 불렀다. 집 앞에 나가 기다리는데 배정된 번호의 택시가 휑하니 지나가기에 곧바로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를 되돌려야 하는 상황이라 나로선 길을 건너야 동선이 맞았고, 마침 횡단보도가 파란불이라 발을 내딛으며 기사와 통화를 했다. 그 짧은 시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대기 중이던 고급 차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깜짝 놀라 뛰려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은 할 수 있다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찰나의 순간 절망감과 깨달음-나는 지금 다리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이 동시에 스치면서 이내 화가 치밀었다. 곧바로 그 차의 운전자를 째려보며 나는 무릎을 탁탁 쳤다. 안 보이냐고. 나 다리 못쓰는 거 안 보이냐고.

웃지 못할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천천히 속도를 높여 내 옆을 스쳐가던 그 운전자의 심정을 읽는다.
'미친 거 아니야. 정신 나간 아줌마가 전화에 정신 팔려 신호등 바뀌는 줄도 모르고 어디다 대고 성질이야.'

울컥하고. 민망하고. 화나고. 내가 불쌍하고.
나는 굼뜨고 생각 없는 중년 아줌마가 되어 다가오는 택시를 바라봤다.


2.

이제 버스나 지하철을 조심조심 타본다. 얼마 전 버스에서 내리는데 구형 버스라 계단이 높았다. 한 단씩 내려서는데 역시나 그 짧은 시간, 뒤에서 한 청년이 어어하며 내 트렌치코트 뒷자락을 밟으며 중심을 잃는 게 느껴졌다. 부지직 옷자락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놔, 내 옷을 잡아 뜯었다 이거지, 이 자식이. 확 째려보며 옷자락을 만져보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멀쩡했다. 청년은 몹시 민망해하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디 찢어진 데 있나 다시 보세요. 죄송합니다.."

"아니, 조심해서 내리셔야죠.."

옷자락을 살피고 또 살핀 뒤 인상을 풀지 않은 채 청년과 헤어져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깨달았다.
규정속도위반은 그 청년이 아니고 나였음을.
세상엔 평균 하차 속도라는 게 있음을.


며칠 전 비에 단풍은 곱던 자태를 잃고 쇠락하는 11월의 빛깔로 바뀌었다. 그 많던 낙엽은 누가 치웠을까.
누군가는 행복해하고 누군가는 수고하는 계절이 되었다.


2018년 11월 12일


딱 1년 전 쓴 글이다. 지금 나는 그때와 많이 다르지 않다.

삶은 되풀이되고 나아가다 다시 주저앉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겸손해지는 지혜를 얻는 거라는 진리를 순전히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깨닫는다.

대학 시절,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 산자락의 막다른 골목에서 끝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볕 좋은 가을이 되면 엄마와 이모는 젖은 고추를 사서 낮에는 집 앞 길가에, 밤이면 걷어서 안방에 불을 넣고 말리곤 했다. 그 시기엔 온 집안에 고추 냄새가 가득했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그 작업에 정성스럽게 몰두했다. 그만큼 고춧가루가 살림에 중요한지 나는 몰랐고, 그래서 어느 날 옆집 아저씨가 자동차로 우리 고추를 와지끈 소리가 나게 밀고 지나던 날 벌어진 작은 말다툼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엄마와 이모에게 화를 냈다.

"그러게 왜 생각 없이 길에다 고추를 널어요." 우리 집이 몰상식한 집이 된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이모가 한 대답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신세도 지고 봐주기도 하면서 사는 거야. 오랜 이웃인데-실제로 그 집 아줌마와 엄마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어떻게 저러냐."


그때 일을 떠올리며 나는 역시나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아니, 이미 그렇게 하고 뻔뻔히 살고 있다.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을 받아가며, 그러나 메신저에 ㅠㅠ 나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 같은 것은 보내지 않는다. 언젠가 갚을 날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2019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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