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를 앞둔 어느 날, 어머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점(?)을 보러 가셨다. 점술가는 잘 될 거라면서, 시험 당일 푸른색이나 흰색이 길하지, 절대 붉은색을 몸에 지녀서는 안 된다고 했단다.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시험날 내가 입을 푸른 코트와 흰 장갑을 사 오셨다.
도시락도 내가 좋아하는 콩밥 대신 흰밥을 싸셨고, 고춧가루가 들어간 반찬은 싸지 않으셨다.
외국어를 좋아하고, 외교관이 꿈이었던 나는, Y대 영문학과에 지원할 생각이었으나, S대 학벌이 인생을 바꿔 줄 거라는 선생님들의 권유에 혹해, 점수에 맞춰 S대 가장 낮은 과에 지원을 했다. 그 시절 대학입시는 먼저 학교 학과를 정해 지원하고, 그 학교 캠퍼스에 가서 시험을 본 후, 점수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시스템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S대 정문을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엄마는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푸른 코트를 입고 흰 장갑을 낀 채 걸어 나오는 내 머리 위에는, 고3 내내 공부할 때마다 흘러내려오는 앞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쓰던 붉은색 집게 핀이 떡하니 올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점술가의 예언대로 나는 지원한 S대 시험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후기로 한국외국어 대학교 영어학과에 합격했다. 좋아하는 영어공부를 마음껏 했다. 그 후로 영어가 내 평생의 무기가 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이었다.
20대 직장생활은 녹녹지가 않았다. 독하게 영어공부를 하며 쌓은 영어실력을 활용해 통. 번역을 하면서, 대학 때 웬만한 직장인 수입을 올렸던 나는 직장에 들어가면 실력은 인정받았으나,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불평을 하며 버티지를 못하고 사표를 던졌다.
급기야는 ‘이 나라는 나를 담기엔 너무 작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결심했고, 세계적인 경영대학원 와튼스쿨에 합격,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후배로 2년간 경영학 공부를 했다. 졸업 후, 외국인으로서 ‘하늘에 별 따기’라는 미국 내 취업에도 성공했지만, 2001년 911 사태로 미국 경제가 안 좋아지며,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맞았다.
서울에서 일을 구할 수밖에 없던 나는, 학교 동문의 소개로 국내 대기업 전략실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컨설팅과 뱅킹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늘 “나는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야”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여기저기 부서를 바꿔가며 일을 했다.
2008년 말, 남편이 고대하던 북경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때마침 둘째를 임신했을 때라, 아이 낳고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일하던 직장에 다시 사표를 냈다.
이삿짐을 싸고 있는데, 일하며 알던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 <Vogue>의 아시아 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북경으로 간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당신의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보그 차이나에 와서 일해 준다면 기쁘겠다. 할 수 있겠는가?”
일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오브 코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이 된,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 <Vogue>의 발행사 컨데나스트(Conde Nast)의 중국지사에서 전략 & 마케팅 컨설턴트로 일을 했다.
출근 첫날, 북경에서 가장 번화한 금융가 고층빌딩에 나를 위해 마련해준 별도의 사무실에 들떠 있는 순간도 잠시, 직원 전원이 참석한 회의에서 앞으로의 시간이 녹녹지 않을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중국지사의 사장님을 도와, <보그>, <GQ>, <셀프> 잡지의 편집장들과, 사업을 책임지는 발행인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편집장들은 중국, 홍콩 등에서 쟁쟁한 매체의 편집장을 지낸 중국 내 유명인사들이었고, 발행인들도 오랜 경험을 통해 업계 최고의 인재 중 스카우트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영국인 보스가 한국서 데려온 스파이를 대하는 의심과 경계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중국시장에 경험도 일천하고, 중국말도 못 하는, 한국 사람인 내가 이들과 어떻게 일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자신조차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쩌면 이 기회가 그동안 내가 그토록 갈망해오던 내 진가가 드러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얼마 지내지 않아, 영국 사장과 중국인 직원들 사이엔, 늘 불편한 긴장이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서로가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관계였다. 그래서 일단 영어 보고서 작성 등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역할을 했다. 또한 중국인들의 편이 되어 중국인들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영국 사장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려 했다.
또한 중국 인력구조를 보니 임원들의 능력은 뛰어난데 비해, 중간 허리층이 약해서 임원들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도 보였다. 그래서 몸을 낮춰 팀의 업무를 세심하게 챙기며 임원들을 도왔다.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둘씩 일에 임하니, 어느새 회사 내에 나와 같이 해야 일이 잘 풀린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됐다. 바쁜 편집장들이 내 사무실에 들어와 부탁을 하고, 매체들 모두 나와 일을 할 수 있게 조정을 해달라고 사장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남편의 임기가 끝나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오게 되었다. 당시 같이 일하던 웨이밍 차오 사장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사실 네가 중국인이라면, 당장 부사장으로 임명하고, 서울로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웨이밍 사장이 한국인 동료에게, 보그에서 일했던 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국 사람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로 국내 최대 잡지사 CEO로서의 경험을 합해, 총 23년 사회생활을 했다. 돌아보면, 영어라는 적성을 찾아 열심히 노력한 것이 나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끌었던 것 같다. 고비도 많았지만 운도 좋았다. 그러나, 나를 진정 빛나게 했던 순간들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걸림돌이었던 '교만과 불평의 망토', 그 망토를 벗어던지고, 낮은 자세로,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일이 무얼 까 고민하며 성심으로 일했던 순간들, 바로 그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 거실 테이블엔 중국을 떠나올 때, 남성잡지 <GQ> 발행인에게 선물 받은 중국 조각가 큐 광치 Qu Quangchi의 작은 조각상이 서있다. 세심하게 조각한 두 날개를 가진 뚱뚱한 천사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마치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하던 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그 조각을 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다시는 그 망토를 꺼내 입지 말자고.